오늘 첫째 독서 신명기는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합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을 전통을 지킨다고 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저는 이 말씀이 이렇게 바뀌어 들립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욕망을 따른다.’
실상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하느님의 계명보다 인간의 전통을 지키는 것을 꼬집으시면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는 것들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인간의 욕망에 오염된 인간의 전통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성이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옳게 알고
욕망이 그 이성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고 욕망을 따른다는 겁니다.
이는 마치 독재자들의 권력욕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데
학자들이 이론적인 뒷받침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한 번 독일을 보십시오.
그렇게 합리적이라는 독일 국민과 학자들이
히틀러의 선동에 집단적으로 휘말리고 따라갔지요.
왜 따라갔겠습니까? 집단욕망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일본을 보십시오.
일부 건강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베라는 아주 못된 인간이 매우 국수주의적이고 우경화된 방향으로
나라를 몰고 가는데 국민은 그를 지지하고 있지요.
지금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4대강 사업이 분명 권력자와 토건업자들의 탐욕을 위해 강을 죽이는 것인데
강을 살리는 사업이라고 그럴듯하게 겉 포장한 것이 바로 학자들이었잖아요.
그리고 법을 안다는 사람은 법망에서 다 빠져나가고
자기와 반대되는 사람이나 힘없는 사람을 사법살인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어떻습니까?
저를 돌아봤더니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의 계명과 저의 욕망이 충돌할 때 저는 저의 욕망을 따릅니다.
그리고 저의 이성은 그 욕망을 따르는 것에 제가 거리낌이 없도록
어떻게 해서든 합리화를 합니다.
이런 저를 볼 때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숫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어서 지키지 못했으면
하느님의 계명이 이러 함에도 제가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면 일말의 희망이 있을 텐데.
그럼에도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나에 대해서는 합리화하면서
다른 이에게 프란치스칸 복음 실천의 특징을 애기할 때는
해석하지 말고 글자그대로 실천을 하라고 역설하곤 합니다.
이런 저에게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권고하지요.
“이렇게 알아들어야 한다는 해석을 덧붙이지 마십시오.
이와 반대로 주님께서 나에게 단순하고 순수하게
말하게 하고 또 기록하게 해 주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해석하지 말고 단순하고 순수하게 이해하며
거룩한 행동으로 끝 날까지 실행하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뜻을 더 잘 그리고 더 깊이 알아듣기 위한 해석은 하되
실천치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해석은 하지 말아야 함을
또 다시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
제가 양심적으로 꺼릴 것이 없을 때는 담백하고 간단명료하게 말하게 되는데
뭔가 당당하지 못할 때는 자신도 모르게 설명이 길어지고 말한 후에는 뒷 맛이
영 개운치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자기 투사나 해석은 자신의 과거 경험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는 차원에서
인간의 욕망에 오염된 인간의 전통의 또 다른 현상이 아닐까.....싶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더 잘 그리고 더 깊이 알아듣기 위한.... 단순하고 순수하게 이해하며
거룩한 행동으로 끝 날까지 실행하도록" 다시 한번 다짐 하는 이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