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예배하는 이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여야 합니다”(요한 4,24). 이 구절에 대해 여러 교부들이 주석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 성 힐라리오와 성 아우구스티노는 특히 “하느님은 영”이시라는 구절을 놓고, 성부도 영이시고, 성자도 영이시며, 성부도 거룩하시고, 성자도 거룩하시다고 풀이한다. 나아가 아우구스티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즉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질로서의 성령과 삼위 하느님의 제 3위격으로서의 성령을 구분하는데,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질로서의 성령은 오늘날의 신학 용어로 “신비”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글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성서와 교부들,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사상과 영성 안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영의 존재이다.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영의 차원을 깊이 천착한 현대 신학자 중 한 분이 칼 라너이다. 라너는 초월 철학과 초월 신학을 전개하면서 인간 존재를 “절대 초월을 지향하는 영”이라고 규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 존재의 심연에는 절대 초월을 존재론적으로 지향하도록 선험적으로 영이 주어져 있으며, 모든 인간은, 주제적이든 비주제적이든, 명시적이든 익명적이든, 절대초월이신 하느님을 인식하고 체험한다. 물론 인간 존재에게 존재론적이고 선험적으로 주어진 영은 완성된 영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주어진 씨앗과 같은 영이다. 모든 인간에게 이 영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양심”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아무튼 모든 인간 안에 현존하는 이 영의 작용으로, 누구든지 신망애나 진선미를 통해 절대 영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는데, 라너는 이 하느님 체험을 성령 체험과 동일시한다. 라너의 저 유명한 “익명의 그리스도인”, 즉 제도 교회 안에서 세례받지 않은 그리스도이 있다는 이론은 그의 초월 사상을 기저로 하고 있다.
한편, 모든 인간 안에 보편적이고 존재론적으로 주어진 초월적 영은 또한 “자유로운 인격적 영”이다. 라너는, 이 영은 절대 사랑이신 하느님 앞에 자유롭게 서 있다고 확언한다. 이러한 초월 인간 규정에서 연역되어 나오는 신학적 사실은 모든 인간은 자유로운 인격적 영으로서 절대 자유이신 하느님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 저자도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요한 8,32)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요한 복음 안에서 진리는 곧 “진리의 성령”을 뜻한다(요한 16,13). 구원의 역사와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는 인류의 역사는 이 진리의 성령을 통해 구원의 자유를 지향하고, 역사의 주체인 인간은 초월적 영이며 자유로운 인격으로서 범주적인 역사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통해 구원의 자유를 구체적으로 주제화시켜 나간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동학 혁명, 삼일 독립 운동,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과 같은 민중 운동 안에서도 인류 역사를 구원의 자유에로 이끄시는 성령의 활동을 감지할 수 있다.
성서와 교부들,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사상과 영성 안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영의 존재이다.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영의 차원을 깊이 천착한 현대 신학자 중 한 분이 칼 라너이다. 라너는 초월 철학과 초월 신학을 전개하면서 인간 존재를 “절대 초월을 지향하는 영”이라고 규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 존재의 심연에는 절대 초월을 존재론적으로 지향하도록 선험적으로 영이 주어져 있으며, 모든 인간은, 주제적이든 비주제적이든, 명시적이든 익명적이든, 절대초월이신 하느님을 인식하고 체험한다. 물론 인간 존재에게 존재론적이고 선험적으로 주어진 영은 완성된 영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주어진 씨앗과 같은 영이다. 모든 인간에게 이 영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은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양심”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아무튼 모든 인간 안에 현존하는 이 영의 작용으로, 누구든지 신망애나 진선미를 통해 절대 영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는데, 라너는 이 하느님 체험을 성령 체험과 동일시한다. 라너의 저 유명한 “익명의 그리스도인”, 즉 제도 교회 안에서 세례받지 않은 그리스도이 있다는 이론은 그의 초월 사상을 기저로 하고 있다.
한편, 모든 인간 안에 보편적이고 존재론적으로 주어진 초월적 영은 또한 “자유로운 인격적 영”이다. 라너는, 이 영은 절대 사랑이신 하느님 앞에 자유롭게 서 있다고 확언한다. 이러한 초월 인간 규정에서 연역되어 나오는 신학적 사실은 모든 인간은 자유로운 인격적 영으로서 절대 자유이신 하느님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 저자도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요한 8,32)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요한 복음 안에서 진리는 곧 “진리의 성령”을 뜻한다(요한 16,13). 구원의 역사와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는 인류의 역사는 이 진리의 성령을 통해 구원의 자유를 지향하고, 역사의 주체인 인간은 초월적 영이며 자유로운 인격으로서 범주적인 역사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통해 구원의 자유를 구체적으로 주제화시켜 나간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동학 혁명, 삼일 독립 운동,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과 같은 민중 운동 안에서도 인류 역사를 구원의 자유에로 이끄시는 성령의 활동을 감지할 수 있다.
바오로 형제님은 신앙의 커밍아웃을 하시죠. 말씀하시는거보면 딱 개신교 수준인데
한마디로 교황님께서도 명백하게 김정일에게 반대한다는것을 드러낸것인데도 불구하고,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여러차례 친김정일세력들의 위험함을 경계하셨음에도 불구하고,김정일을 찬양하는 사제단과 가톨릭을 가장한 빨갱이들에게 다시한번 극심한 분노를 느낍니다! 이러한 사제단에게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주교단에 대해서도 실망을 느낍니다..정진석 추기경님이나 남아있는 다른 주교님들도 모두 훌륭하기는 하지만,저같은 평신도가 어찌 그분들을 평하겠냐만....김수환 추기경님처럼 적극 나서시진 않는건 확실해보입니다!!
기사출처:http://web.pbc.co.kr/CMS/newspaper/view_body.php?cid=297163&path=200906
시간이 맞지 않아 중단하고 얼마 후에 갔더니 수사님의 교수법이 달라지셨더군요.
이유는 다 알아듣는 줄 알고 그 동안 열심히 강의했는데 강의를 듣고 난 후 엉뚱한 질문들을 해대는 것을 보고 당신이 깨달은 것은 지금까지 상대의 수준을 잘 모르고 이 정도는 알아듣겠지, 했던 당신의 실수였다고,
그래서 상대의 수준에 맞추어서 풀고 또 풀어서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아주 알아듣기 쉽게 교수법을 바꾼 이유였습니다.
오래되어서 분명하진 않지만, 제가 어딘가에서 읽은 어렴 붓이 기억나는 구절이
“하느님께서 실수하신 것이 딱 하나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의 수준을 너무 높게 보신 까닭에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결과가 되었지만............이하생략 ”
신부님께서 실수를 하셨다면 아마 상대의 수준을 너무 높게 보신 까닭일 겁니다.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상대의 수준에 맞추어 풀고 또 풀어서 손에 쥐어 주듯 말씀하시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위해 하나 뿐인 목숨을 내어놓았고 그 발자취를 따라 걷고자 들어선 신부님에게 이쯤의 수난이야 대수겠습니까!
더 이상 해명하려고도 마음 아파하지도 마시기를....
신부님의 강론에 이의를 다는 분들의 완곡한 표현은 그 만큼 신부님께 거는 기대의 또 다른 표현인 동시에 진리를 따르고자 하는 몸부림의 한 표현일 겁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왔기에 누구도 진리에서 떨어져 나가고 싶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희망이고 그래서 그들을 또 품어 함께 가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진리를 위한 다는 이유로 상대의 영혼에 상처 주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결코 원치 않으신다는 걸 하느님을 믿는 신자라면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들판에 더 적게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하느님을 어디에서나 똑같이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다.
- 13세기 신비 신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