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더러운 귀신의 영이 들린 사람의 조우 얘깁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더러운 귀신의 영이 들린 사람의 조우지만
대화는 예수님과 더러운 귀신의 영 사이에서만 오갑니다.
영이 들린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영이 말을 합니다.
이것은 성령이 들린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도 같은 뜻으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사도행전 21장에서 하가보스라는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엘리사벳, 즈카르야, 스테파노와 같이
거룩한 사람들과 성인들은 성령에 가득 차 성령의 말을 합니다.
그러니 자기의 말을 하는 사람은 성령이든 악령이든
영이 들린 사람이 아닌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성령을 영접한 사람인지,
더러운 영이나 악령이 들린 사람인지,
나로 똘똘 뭉쳐 어떤 영도 거부하는 사람인지.
그리고 우리는 이런 비교사유를 할 수도 있습니다.
더러운 영이나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기보다는
내 안에 갇힐지라도 악령을 거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내 안에 갇혀 있건 악령이 들려있건
성령을 영접치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죠.
그리고 하느님이 필요 없어서 원치 않는 사람이나
하느님이 싫거나 성가셔서 거부하는 사람이나
하느님과 단절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지요.
실상 자기 안에 갇혀 하느님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
악령으로 인해 하느님을 거부하던 사람보다 더 문제일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악령이 들린 사람은
주님을 알고, 주님과 대면하며 대화를 하고,
주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주시면 성령을 모시는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자기로 똘똘 뭉쳐서 영에 대해서는 무감증이고, 불감증인 사람은
하느님 안 계신 것이 아무 문제없는 듯이 계속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론적 무신론자보다 실천적 무신론자가 더 문제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의심하고 그래서 부정하는 사람은
그 큰 의심 때문에 토마 사도처럼 언젠가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게 되지만
하느님의 존재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기에 하느님 체험이 아예 없을 수도 있지요.
아무튼 오늘 복음의 더러운 귀신의 영이 주님께
무슨 상관이 있냐고 관계성에 대해 따지는데
우리는 관계성을 따지지 않을 정도로
정말 아무 상관없이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되새김질 할 시간도 없이 여기 저기 다니며 정신없이 들은 것은 있어서
이론적으로는 강했을지 모르지만 실천적인 신앙인은 아니였고
그런 제 모습안에는 상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저항감만 올라오는.....
이 저항감이 교만이라는 사실을.....바리사이들이 예수님 앞에서 저항하는 그 모습이
바로 제 모습이라는 사실을 어느 순간 알아차릴 때 얼마나 낮이 뜨거웠던지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마음이 움직이지않는 무딘마음 앞에서는 어떤 말도,
마치 화살이 반대편 벽에 닿았다 튕겨저 되돌아 오는 것처럼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벽을 허물기 위해 그 벽보다 더 강한 성령으로 제 자신이 무장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관으로 관주하고 떠나고 싶은 제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겠습니다.
그에게는 그가 그럴수 밖에 없는 그 만의 숨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