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지 마시오.”
미래가 없는 사람.
미래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통 현세에서 장래 희망이 없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반면 이 세상에서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지금까지 많은 것을 얻고 이루었음에도
해야 할 더 많은 일이 있고 그래서 밝은 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다른 관점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미래가 없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밝은 미래가 있고,
이 세상에서 잘 나가던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미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누가 더 미래가 없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미래가 없는 사람이 더 미래가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저 세상에서 미래가 없는 사람이 더 미래가 없는 것입니까?
오늘 루카복음은 이런 면에서 확실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저 세상, 하느님 나라에서 미래가 없는 사람을 불행하다고 말입니다.
루카복음과 마찬가지로 행복선언을 전하는 마태오복음은
그러나 루카복음과 달리 불행선언을 하지 않습니다.
행복선언을 하되 현재적 행복과 미래적 행복을 다 얘기합니다.
첫 번째와 여덟 번째 행복선언은 현재형이고,
두 번째부터 일곱 번째 행복선언은 미래형이지요.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어
미래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되어야 함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전부인 듯 미래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안중에 없거나
행복을 미래 하느님 나라에서나 실현되는 것으로 얘기해서는 안 되지요.
그럼에도 죽고 난 뒤의 행복은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부자들에게
너의 행복은 이 세상이 끝나는 것과 더불어 끝이라고
루카복음의 주님께서는 오늘 선언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루카복음의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부자는
돈의 많고 적음으로 계량되는 부자가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불행하다고 하는 부자는 이 세상 재물로 만족하는 부자요
이 세상의 거짓 행복 때문에 하느님 나라를 찾지 않는 부자인 거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얼마 이상 가지면 부자이고 얼마 이하를 가지면 가난한 것입니까?
몇 천 억을 가져도 그것에 행복을 두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가난한 사람과 나눈다면 그는 부자가 아니고
불과 천만 원 밖에 없어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갈망은 전혀 없이
그저 돈, 돈, 돈 하며 살아간다면 그가 부자인 것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골로새서의 바오로는 의미 있는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새 사람이 되었으니
지상 것을 구하지 말고 천상 것을 추구하라고 하고,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 되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이여”라고 밤새 기도한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