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
오늘 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데
제 식으로 풀이하면 바오로 사도는 죄를 지은 사람이고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죄를 지었지만 오히려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바오로 사도처럼 지녀야 할 자기 인식인 것이지요.
우리는 많은 경우 이렇게 보지 못합니다.
죄도 보지 못하고 은총도 보지 못합니다.
죄를 보지 못하기에 은총도 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눈 먼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바로 교만으로 인해 완전히 눈이 먼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눈에 뵈는 것이 없는 사람이지요.
교만한 사람은 무시를 잘하는데
무시無視란 한자말로 시력이 0이거나
있는데도 없다고 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자기 죄에 대해서도 보지 못하고
자기 아닌 다른 존재,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느님도 못 보고 하느님을 못 보기에 은총도 못 봅니다.
그런데 죄는 보고 은총은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죄만 보기에 은총을 못 보는 것이지요.
왜 이렇게밖에 못 보는 것입니까?
제 생각에 이것 또한 교만 때문입니다.
죄와 은총 모두 못 보게 하는 것도 교만이고
죄만 보고 은총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도 교만이라는 얘깁니다.
그러나 교만의 결이랄까 정도가 다릅니다.
모두 완전히 못 보게 하는 교만은 자기가 세상의 최고이고
자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기고만장氣高萬丈한 교만이라면
죄만 보고 은총을 보지 못하게 하는 교만은
자기는 죄가 없어야 하는데 왜 죄를 지었냐고,
내가 요것밖에 안 되냐고 자신을 미워하는 자학적인 교만인 것입니다.
무결점, 무죄의 자신이어야 한다는,
무결점, 무죄의 자신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교만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으로 내 눈이 멀었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내 눈에 교만이라는 대들보가 들어있어 보지 못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주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은총을 베푸심을
겸손의 눈, 믿음의 눈, 영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