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당연하다는 듯 쓰곤 하지만
사실은 논쟁의 소지가 있기에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 말이 죄인 아닌 사람은 구원하러 오지 않으셨다는 말이나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오시지 않으셨을 거라는 말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 말은 의인만을 구원하실 거라는 인간의 얕은 생각과 다른,
내 마음에 드는 선인만을 사랑하는 인간의 얕은 사랑과 다른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는 말로 알아들어야지요.
실로 사람이 죄짓지 않을 리도 없고,
죄인이 아닌 사람도 없는데도
다른 사람은 죄인이고 나는 죄인이 아니라는 듯,
자기의 죄를 인정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더 큰 죄인이라는 듯
그렇게 사는데 그것은 큰 착각이고 자기 최면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 비해 바오로 사도는
죄인들 중에 첫째가는 죄인이 자기라고 하고,
그럼에도 주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며,
그렇기에 주님께서 자기를 세상 구원의 도구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이런 말이 전에는 진심이 아닌 말처럼,
겸손을 가장한 말처럼 제게 들리곤 했습니다.
프란치스코도 같은 뜻의 말을 한 적이 있지요.
언젠가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프란치스코에게 맛세오 형제가
농담조로 “왜 당신을... 왜 당신을...왜 당신을”하고 말을 건네니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프란치스코에게 다시
귀족도, 미남도 아니고, 학식도 없는 당신을 왜 세상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고, 왜 당신 말을 들으려하냐고 묻지요.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 세상 죄인들 가운데 자기보다
더 천하고, 더 부족하고, 더 큰 죄인을 보지 못하셨기에
하느님께서 자기를 뽑아 잘나고 지혜롭다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만선만덕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답하지요.
이 일화를 들을 때마다 저는 프란치스코가 정말 이렇게 생각했을까,
내숭을 떠는 것,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지금도, 오늘도 저의 겸손의 수준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지만
그러면서도 겸손이 바오로 사도나 프란치스코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면
정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성인들의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는 겸손이지요.
성인들은 사람들 앞에 있지 않고 사람들과 비교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하느님 앞에 있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바라볼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하느님 앞에 있으면서 누가 눈을 옆으로 돌려 다른 사람을 보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내가 이 사람보다 낫다 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내 죄가 크지 않을 수 있지만
지극히 거룩하신 분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며,
죄인일 뿐 아니라 내 죄 너무도 큼을 느끼지 않을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느님 앞에 서고
그러나 하느님 자비 앞에 서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 바람을 가져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