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가 거룩하다고 하면서
그 거룩한 십자가를 높이 우러르며 찬양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들 아시다시피 십자가는 죽음의 틀인데
이 죽음의 틀을 거룩하다고 하며 현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서 돌아가시기만 하셨다면
이 십자가는 오히려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운 것이 되겠지요.
만일 자신이 사준 자동차 사고로 아들이 죽은 부모가
그 자동차를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원망스럽고 저주스러우며,
자기가 그것을 사준 것이 얼마나 한탄스럽겠습니까?
그것을 그대로 나두지 않을 것이고, 빨리 폐차하겠지요.
그러므로 십자가가 거룩하고 십자가를 우러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시면서
죽여 없애야 할 것들을 바로 그 십자가에 못 박으셨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죽여 없애야 할 것들이란 어떤 것들입니까?
죽음과 죽음의 두려움.
세상 즐거움과 욕망.
이 세상 애착과 교만,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이것을 바오로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알아듣기 쉽지 않은 말씀인데 제가 이해한 것은 이렇습니다.
세상이 이제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어도 세상 재미는 아무 재미가 없고,
이 세상의 재물이나 성공 같은 것이 이제 다 헛것인 겁니다.
그런데 내게 있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사실은 같은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이 세상도 내 안에서 죽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나도 죽고 세상도 내 안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 죽고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같은 갈라디아서에서 다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죽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나 혼자 죽고 나만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허무하고 억울한 것이기에
내가 죽을 때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는
다른 데서 부활하시지 않고 내 안에서 부활하시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는 것은
같은 십자가에 같이 못 박히고 매달린다는
그리스도와의 깊은 인격적인 매달림이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신부님의 묵상글을 대하면서, 물론 오늘만이 아니라,
혹여 엉뚱하게 알아듣고 딴 소리 할까봐 구구 절절이 쉬운 말로 풀고 또 풀어서
우리가 오해 없이 알아듣도록 표현하시는 글을 읽으면서
문득, 예전에 제가 같은 것을 반복하며 계속 실수를 할 때
어머니께서 "얘야, 너는 어찌 그렇게 소귀에 경 읽긴지 모르겠다......!"라고
한탄 섟인 말씀을 하셨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때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몰랐고 이제 와 조금 철이 들면서
자식을 아무리 사랑해도 대신 죽을 수 없는 애절함이 그 한탄 섟인 말씀에
담겼었다는 것을 오늘을 새롭게 신부님의 구구절절한 표현을 통해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어제도 이렇게 마음 아팠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죽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되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나 혼자 죽고 나만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허무하고 억울한 것이기에
내가 죽을 때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는
다른 데서 부활하시지 않고 내 안에서 부활하시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는 것은
같은 십자가에 같이 못 박히고 매달린다는
그리스도와의 깊은 인격적인 매달림이어야 할 것입니다."
소귀에 경 읽기가 되지 않도록 마음에 새기며 다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하는 이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