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작년 성모 통고 축일에는 성모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수난을 같이 느끼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위로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과 바람도 있었지만
‘말이 씨가 되어, 정말 그리 되면 어떻게 하지?’하는 두려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올해 성모 통고 축일에는 상처를 준다고 다 받느냐고 말했었지요.
원치 않으면 받지 않으면 될 것을 왜 받느냐고 제가 얘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처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매조키스트(피학대증 환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상처 받는 것이 그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까?
아는 사람은 다 알 듯 성 프란치스코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고,
그 정도는 아니어도 사랑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상처 받아 신음하는 사람 앞에서 상처 없는 사람인 것이 미안합니다.
저만 해도 앞서 말씀드렸듯이 같이 상처 받는 게 두렵다가도
사랑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올라오면
자식 때문에 고통당하는 부모를 보면 자식없는 제가 미안하고,
북한 사람이나 탈북자를 보면 남한에서 태어난 제가 미안하며,
재활을 위해 힘들게 걷는 분들을 보면 마라톤을 하는 제가 미안하고,
돈 때문에 형제간에 불화가 있는 가정을 보면
돈이 없어 형제 관계가 그래도 괜찮은 편인 저희 형제들이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옛날 양성을 하면서 수없이 형제들에게 상처를 줬고
지금도 상처를 주는 제가 이제는 상처를 덜 주려고 하고,
그렇게 상처를 주면서도 상처를 받지 않던 제가
지금은 그래도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미안한 단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직도 상처 받는 것을 싫어하는 단계이지요.
프란치스코처럼 상처를 사랑하는 단계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상처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상처를 사랑한다기보다는 상처받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래서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꺼이 원하는 거겠지요.
사랑은 속성상, 아니 본질상
자기를 희생하지 않으면,
자기를 무화하지 않으면,
자기를 바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 것 같고,
촛불처럼 자기를 태울 때 사랑이 타오르는 법이지요.
그리고 작은 불꽃은 한 사발의 물로도 꺼지지만
거대한 화염은 한 동이의 물로도 끌 수 없고
오히려 불길이 더 타오르고 번지게 하겠지요.
프란치스코는 바로 이런 사랑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인데
이런 사랑이 한 순간에 그리고 저절로 타오른 것도 아닙니다.
거대한 불길도 처음에는 작은 불꽃이었듯
프란치스코의 사랑도 처음에는 제 사랑만큼 작았을 겁니다.
프란치스코의 사랑도 처음에는 나환자를 보는 것이 두려운 사랑이었습니다.
하여 그의 사랑에서 나환자는 제외시켰고, 만날까 두려워 피해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피할 수 없는 외길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용기를 청하는 기도와 함께 그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나환자를 껴안았을 때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이, 나환자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 들어왔습니다.
불길이 커지기 위해서는 더 많은 땔감이 필요하듯
사랑이 커지기 위해서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다 필요합니다.
이렇게 싫은 사람, 저렇게 싫은 사람을
프란치스코가 나환자를 껴안듯 피하지 않고 껴안을 때
프란치스코에게 나환자가 그리스도였듯 그들이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의 사랑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오상은 전 생애에 걸친 이런 사랑의 작업의 결과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고 싶은 내적 열망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저도 죽기 전에 프란치스코처럼 십자가 위의 주님 수난과 사랑을
똑같이 느끼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