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두 번째 당신의 수난예고를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라고 하십니다.
첫 번째 수난예고를 하셨는데 그 말씀이
제자들의 귀에 아직 들어가지 않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다시 한 번 당신의 수난에 대해 예고를 하시는데
그런데 두 번째 예고마저도 알아듣지 못하였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알아듣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 뜻이 감춰진 것일까요?
주님께서 그 뜻을 숨기셨기 때문일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잘 귀담아들으라고 하시는 주님,
그 뜻을 알아듣기를 바라시는 주님이 그 뜻을 숨기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뜻이 너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일까요?
어제 봤듯이 그리스도가 그렇게 힘없는 분이라는 것이
세속의 관점에선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뒤의 말씀을 보면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싫었거나 적어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제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하지요.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왜 묻는 것조차 두려웠을까 묻게 됩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 뜻을 아직도 모르냐고 핀잔이나 꾸중을 들을까봐 두렵거나
그 뜻을 알게 되었을 때 취해야 할 행동의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게 되었을 때 취해야 할 행동의 두려움 때문에
묻지 않는다는 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이런 뜻이지요.
모르면 물어야 되고, 진정 알고프면 물을 것입니다.
그런데 묻는 것도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게 되었을 때 난처한 상황에 처할까봐 두려웠던 것이고
알면 그 싫은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기에 모른 체 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알게 될까봐 두렵고, 그래서 모르는 체도 하고 못 본 척도 합니다.
알면 골치 아파서도 그렇고, 보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도 그렇겠지요.
예를 들어 제가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 우리가 뭣을 해야 한다고 얘기하면
이념적으로 북한을 싫어하는 신자들은 북한을 복음화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할 수는 없지만 요나 예언자처럼 감정적으로는 그 일을 하기 싫기에
못 들은 것으로 하거나 북한에 대해서 더 알려고 묻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보통 이렇게 좋은 것만 듣고 싫은 것은 듣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의도적인 무지, 선택적인 무지에 빠져서 삽니다.
모르면 편한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삶은 당장은 편한데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심리학에서 심리 정신적으로 건강한지 허약한지 이렇게 테스트한다지요.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을 모두 먹어야 할 때 어떤 것을 먼저 먹는지.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사람은 허약한 사람인데 당장의 즐거움 때문에
미래의 즐거움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고 그래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맛없는 것을 먼저 선택한 사람은 당장은 그것이 싫고 괴롭지만
미래의 즐거움과 행복에 대한 희망 때문에 당장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뿐 아니라 감당해낼 수 있는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어머니가 다섯살 때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맞이 할 때마다 외모만 보고,
지금의 어머니가 새어머니로 네번째인 어느 청년의 어렸을 적 경험은
이 다음에 준다고 했던 것들이 자기에게 돌아온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그래서 자신은 사람도, 이 다음이란 말도 믿지 않고 그때 그때 갖고
싶은 것을 갈취하듯 취하고....
자신에게 미래는 있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는
그래서 저축도 하지 않고 있다는 청년의 가슴 서늘한 말은 제 마음을 멍먹하게 했고
같은 인간으로 무척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떠오름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신앙적 믿음이전에 부정적인 마음을 품고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인가!.......스스로 다시 한번 돌아보는 이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