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전에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넘겨 성화에 이르십시오.”(로마.6,19)
성화란 무엇일까요?
어떤 경지가 성화의 경지일까요?
그야말로 무죄의 경지를 말함일까요?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얘기하면 무죄의 경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무죄의 경지인 성화가 왠지 제게는 마뜩찮습니다.
그것은 죄 안 짓기도 쉽지 않거니와
무죄함에 이를 수 있을지라도 그런 성화에는 이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조그만 죄에도 그렇게 괴로워하고 자신을 학대까지 하며
무죄한 내가 되는 것에 결벽증 환자마냥 집착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는 성화를 이룬 성인들이란 무죄한 존재였고
저는 이런 성인이 되고 싶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만큼 죄를 많이 짓고 나서
그리고 나보다 죄를 더 많이 지은 다윗을 만나고 나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며칠 전에 말씀드렸듯이 죄의 어둠에 머물거나 죄에 매이지 않고
다윗처럼 죄를 가지고 빛에로, 은총에로, 사랑에로 나아가는 거지요.
다윗은 무죄한 성인이 아니라 회개한 성인이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무한 신뢰한 성인이며,
어쩌면 죄인이어도 좋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성인입니다.
저는 주님의 궤를 모시며 왕의 체면도 생각지 않고
옷을 벗은 채 신하들과 춤을 춘 다윗을 높이 평가합니다.
이런 자신을 비난하는 아내 미칼에게 다윗은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와 그 집안 대신 나를 뽑으시고,
나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바로 그 주님 앞에서 내가 흥겨워한 것이오.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2사무6,21-22)
저도 지금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죄인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내가 되면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랑보다 하느님 사랑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면 되는 겁니다.
무죄함의 성화가 아니라 사랑의 성화를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죄에 머물지 않고 사랑에 머물며,
세상의 어둠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에 머물며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한 즐겁고 기쁘게 살면 되고,
더 나아가 하느님 사랑으로 사랑을 나누며 산다면
그것이 성화의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