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어제 마라톤을 뛰었기 때문인지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눈을 뜨기 전, 그러니까 잠결에 오늘 묵상을 했습니다.
비몽사몽간에 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다른 때와 달리 기억에 남아있는 겁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제가 천당인지 연옥인지 가야 하는데 그 어느 곳이건
내가 혼자 하느님께로 가는 거라면 가기 싫다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꿈을 꾸고 눈을 떠서 바로 든 생각은
어제의 모든 성인의 날이건 오늘의 위령의 날이건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과 하느님 안에서 통교를 한다는 뜻인데
이것은 아직 살아있는 우리와 이미 죽은 이들의 통교를 뜻하면서도
다른 한 편 삶과 죽음의 통교도 뜻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얼마 전부터 저는 변화를 느끼는데
그것은 요즘 신자들의 미사 지향의 변화입니다.
옛날, 그러니까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우리 한인 신자들이
다른 신자들과 비교할 떼 미사 봉헌보다 미사 예물을 많이 바쳤는데
그 미사 예물의 지향이 대부분 연미사였습니다.
돌아와서 한국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생미사가 연미사보다 늘어나고,
그중에서도 자녀들을 위한 생미사가 더 많습니다.
아직까지는 이 변화가 옳은 변화인지 잘못된 변화인지,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 판단을 안 해봤지만
아무튼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고 그래서 생각게 됩니다.
이것이 치사랑은 소홀하고 내리사랑만 중시하는 표시인지,
아니면 죽은 이들과의 통교가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아무튼 우리 교회의 가르침도 그렇고 오늘 축일의 의미도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산 이들 간의 통교와 사랑도 잘 살아야 하지만
죽은 이들과의 통교와 사랑도 잘 살아야 하고,
죽음과 삶과의 단절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지요.
생각해보면 요즘 수도원 안에도 소통이란 말을 많이 하고
그 소통을 위해서 여러 심리학적 방법도 도입하곤 하는데
소통이란 말을 많이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고,
소통이 안 되는 이유가 하느님 안에서의 통교가 안 되기 때문은 아닌지,
더 확대하여 따져보면 하느님 안에서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통교,
삶과 죽음의 통교가 잘 안 되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게 됩니다.
좋은 사람끼리만 소통하려 하고
인간적으로만 소통하려 하기에 불통하게 되는데
우리는 오늘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모두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시는 주님 말씀대로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데려 가고,
산 이들만이 아니라 죽은 이들도 데리고 가서
이 세상의 안식이건 영원한 안식이건 누리게 하려는
그런 마음과 자세가 있어야만 진정한 소통이 이뤄질 것입니다.
위령의 날의 위령은 영혼들의 위로, 영혼들의 위안을 말하지요.
산 이건 죽은 이건 영혼들에게 주님께서 안식을 주십사고 기도하고,
주님께서 주십사 기도할 뿐 아니라 우리도 나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산 이건 죽은 이건 말로 위로하고 기도로 위안하기로 다짐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