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과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지혜 3,1-2)
의인들의 영혼은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거라는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정말로 의인에게는 아무런 고통도 없다는 뜻인가?
육신의 고통은 있어도 영혼의 고통은 없다는 뜻인가?
이 세상에서의 고통은 있어도 죽고 난 뒤에는 없다는 뜻인가?
우선 의인이라고 해서 고통이 없다는 말은 말도 안 됩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은 오히려 의인에게 고통이 더 많습니다.
우리의 바람과 기대는 악인은 벌을 받아 고통을 더 많이 당하고
의인과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벌을 받지 않고 그래서 고통이 없는 거지만
실제로는 악인들이 더 행복하고 의인들이 더 고통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에게 고통이 없다는 것은 우선
하느님 안에서 고통이란 없다는 말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어제는 저희 형제의 어머니의 장례 미사가 있었습니다.
이 미사에서 우리가 늘 듣게 되는 것이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죽음이 아니라는 것,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삶에로 옮아감이라는 것이지요.
하느님 없이 이 세상을 사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이
죽음은 이 세상의 끝이고, 파멸이고, 그야말로 죽음일 뿐이지만
하느님 안에 사는 이에게 죽음은 이 세상 삶에서 저 세상 삶으로 옮아감,
생명에서 생명으로 옮아감,
다시 말해서 죽고야 말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감일 뿐입니다.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고통이 원치 않고 싫어하는데도 주어진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단련이고
그러기에 하느님의 은총이요 사랑이지요.
그래서 오늘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3,5)
그렇다면 그 은혜는 어떤 은혜입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우리는 본래 종일뿐이고,
하라는 대로 하였다고 해서 고맙다는 소릴 듣지 못하고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해야 할 종일뿐인데
광야의 유혹을 이겨내신 다음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로 선포되신 주님처럼
이 고통의 단련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이 그저 시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단련하는 것이 되게 하여 하느님의 아들로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의인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어 고통을 겪지 않는다는 말을
이렇게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 고통이란 원치 않는 것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될 때 느끼는 것인데
만일 스스로 원해서 한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거나 즐거움이지요.
예를 들어 추운 겨울에 자식에게 줄 밥 짓기 위해 찬 물에 손을 담그면
육신은 추위의 고통을 느끼지만 마음은 사랑으로 훈훈하고,
새벽 추위를 뚫고 성당에 가면 그 추위만큼 가슴에 불이 타오르지요.
박해 때 순교자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평상시 같으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엄청난 고문을 감당하고
죽음도 감수하는데 그것은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죠.
인류 사랑으로 받아들인 고통, 이것이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인데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받아들이면 고통일 뿐이지만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수난이 되고 사랑이 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