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주간 지혜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부분으로서 제가 보기에 재창조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계절들의 거의 끝자락에 와 있고
전례적으로도 연중시기의 끝에 와 있기에 이 말씀을 듣는 것이겠지요.
창세기의 창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명령 하나로 온 피조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생명生命이라는 한자어가 품고 있는 뜻이 그러하듯
생기라는 명령대로 된 것이 생명이라고 얘기합니다.
진정 온갖 생명은 생기라는 명령에 순명한 것입니다.
명령에 불순명한 생명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니 불순명할 나조차 없었습니다.
나도 그렇고 생명들이란 본래 모두 이렇게 허무한 것들이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Creatio ex Nihilo>,
하느님께서 무로부터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창조의지, 곧 사랑이 아니었다면 모든 생명과 존재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할 수도 없었으며,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창조만 하느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끝도 하느님의 말씀,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때가 다 되어 나무는 이파리를 떨군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어제는 비가 와서 나무가 잎들을 속절없이 떨구었는데
비가 와서 잎이 떨어졌다고 비와 바람을 탓할 수 없고,
때가 저승사자처럼 찾아와 잎을 떨군 거라고 해야겠죠.
이것을 아는 것만도 현자의 지혜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종종 잎이 떨어지는 것을 비바람 탓하듯
인생의 실패와 추락도 남 탓하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한 여름 싱싱한 나뭇잎이 비바람에 떨어지지 않고
때가 되어서 떨어지는 것이라고 알고 때에 순응하듯
자기의 실패와 추락도 남 탓하지 않고 물러날 때를 알고 때에 순응하지요.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의 지혜는 이런 지혜도 초월합니다.
때의 시작과 끝이란 것도 저절로 그리 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명령에 의한 것임을 압니다.
이것을 오늘 지혜서는 아주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 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는 당신의 단호한 명령을
날카로운 칼처럼 차고 서서 만물을 죽음으로 가득 채웠습니다.”(18,15-6)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나무로 치면
잎이 진 가지에 새로운 잎이 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잎이 떨어지는 가을 없이 새 잎이 돋는 봄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늘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창조된 우리도 늘 새롭게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 윤회처럼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자녀로서 본성이 새롭게 되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지혜 19,6)
가을의 끝자락에 서서 이파리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며 우리도
지상의 옷을 벗고 천상의 옷으로 갈아입게 되기를 갈망합니다.
죽어야 새로 태어나는 우리이므로 하느님의 자녀로 부활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