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무자비하다는 말이 있고, 그 사람 참 무자비하다는 말도 합니다.
그런데 무자비無慈悲는 말 그대로 자비가 없는 것이고
자비가 없기에 다른 사람에게 무자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자비를 지녀야 하는데
그 자비를 어떻게 지닐 수 있을까 오늘 복음은 이것을 묵상케 합니다.
오늘 복음의 눈 먼 사람은 자비를 받게 되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그는 자비를 필요로 하는, 그것도 아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자비를 주십사 청하는데 우리도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할 때
이 말을 받아들이는 데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곧, 자비가 필요치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부류와
반대로 왜 자비가 필요하고, 왜 자비를 달라고 하느냐 생각하는 부류이지요.
그런데 실로 많은 사람들이 자비를 필요로 하지도 하느님께 청하지 않는데
우선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치 않고 싶은 사람이 그들입니다.
지금은 미사의 참회 예절 부분에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기도하지만
옛날에는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기도했지요.
그런데 젊었을 때의 저는 이 기도가 참으로 싫었습니다.
내가 왜 불쌍해? 이런 생각이 컸던 것인데, 교만과 자존심 때문이었지요.
불쌍하고 불행한 자기 처지를 저처럼 인정치 않는 사람은 청하지 않지요.
그리고 불쌍한 처지에 자기가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일지라도
자기 힘으로 해결하거나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는 사람은
주님께 자비를 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눈을 하늘로 돌리지 못하는 사람인 거지요.
자기에게 갇혀있거나 이 세상에 갇혀있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안 되고 다른 사람의 힘으로도 안 될 때
자비를 청할 다른 곳, 곧 하늘이 있고,
자비의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의 눈 먼 이는 자비가 필요한 자기의 처지를
겸손하게 인정할 뿐 아니라 하늘에 눈이 열려 있는 사람이었기에
주님을 만나기 전에도 하느님께 자비를 절실히 그리고 오래 청하고 있었고
그래서 주님을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되었을 때 기민하게 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자비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우리의 청원이 숙성된 청원이 되어야만 오늘 눈 먼 이처럼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청원을 하고
다른 사람이 아무리 핀잔을 주고 저지를 해도 청원을 할 것입니다.
자비가 절실히 필요한 자신임을 겸손하게 인정함이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한 차원이라면 또 다른 차원도 있습니다.
믿음의 차원인데, 그 믿음이 나의 믿음이긴 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기도 하지요.
하느님께서는 무자비하지 않고 자비하시다는 믿음
하느님께서는 자기를 무시하지 않으시리라는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무자비하고 남을 무시하기 때문에
하느님도 무자비하시고 자기를 무시하시지 않을까 생각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보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합니다.
사실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특히 하느님의 자비를 보지 못하는 것이
육신의 눈이 먼 것보다 더 비참한 보지 못함입니다.
실로 많은 사람이 세상 것은 기가 막히게 잘보고 하느님은 보지 못하며,
인간의 무자비는 잘도 보고 믿고 하느님의 자비는 보지도 믿지도 못하는데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를 보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는,
그런 영적 맹인이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