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늘의 복음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예리코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얘기이고,
둘 다 주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그런데 둘 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얘기이긴 하지만
어제 얘기는 다른 공관복음에도 있는 얘기이고,
오늘 얘기는 루카복음에만 있는 얘기이니
루카만의 독특한 관점이 반영된 얘기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자캐오와 만나시기 전, 그러니까
예리코에 들어오시기 전에 두 가지 비유를 들려주시는데
하나는 끈질기게 애원을 하는 억울한 과부의 얘기이고,
다른 하나는 바리사이와 세리를 비교하는 얘기입니다.
바리사이는 성전에 나와 자기 의로움과 신앙심 깊음을 젠체하는데 비해
세리는 앞에 나오지도,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그저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한다는 비유지요.(18,9-14)
이 비유들도 루카복음에만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루카는 자캐오 얘기를 전하기에 앞서 이 비유를 미리 깔아놓은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바리사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를 향해 있고,
그러므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독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자신을 향해) 이렇게 기도했다.”(18,11)
그리고 자비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을 하기에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가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에 비해 세리는 하느님께 향해 있고 자비를 청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자캐오가 바로 이 비유의 세리입니다.
우선 자캐오는 주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아니 향하여 있는 정도가 아니라 향하여 달려갑니다.
허나, 달려갔지만 키가 작아 주님을 뵐 수 없자 나이 먹은 사람이
체면도 차리지 않고 나무에 오를 정도로 주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이런 자캐오의 갈망에 주님께서는 자청하여 그의 집에 머무십니다.
그리고 구원이 이 집에 내렸다고 선언을 하십니다.
자캐오가 나무에 오르니 하느님의 구원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의 자캐오의 변화입니다.
하느님께로 향하니 자캐오는 가난한 이웃에게도 향하게 되고,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를 받으니 이웃에게 자비를 실천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19,8)
그렇습니다.
바리사이는 자기에게 향해 있었기에 하느님과 이웃에게 향해 있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자비를 받지 않았기에 이웃에게 줄 자비도 없었습니다.
사실 바리사이 못지않게 자캐오야말로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었고,
바리사이보다 더 모든 것을 움켜쥐고 내놓을 줄 모르던 사람이었지요.
이런 그가 바리사이와 달리 가난한 이웃을 바라보고
그 움켜쥐고 있던 소중한 것을 내놓을 수 있게 된 것은
하느님 구원의 행복을 체험했기 때문이지만
하느님 구원의 행복을 체험하게 된 것이 바로
자기밖에 모르고 움켜쥐고 사는 삶의 불행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에 비해 바리사이는 끝까지 그것을 모르고 자기가 잘난 줄,
자기가 행복한 줄 알았기에 하느님의 구원을 청하지 않았던 것이고요.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니까!”
이것이 제가 입버릇처럼 떠들고 다니는 말인데
저의 행복이 진정 구원받은 사람의 행복인지
아니면 바리사이처럼 착각하는 사람의 행복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