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비유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종 열 사람에게 각기 한 미나를 주고 왕위를 받으러 멀리 떠난 귀족과
똑같이 한 미나를 받았지만 각기 다른 결실을 맺은 종들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같은 비유가 마태오복음에도 있는데 사뭇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받은 것이 미나가 아니라 더 큰 단위인 탈렌트이고,
같은 액수를 받은 것이 아니라 다섯, 둘, 한 탈렌트로 달리 받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점이 있는데
마태오복음에서는 주인이 그저 여행을 떠날 뿐이기에
돌아오는 것을 종들이 반대하지 않는데 비해
루카복음에서는 주인이 왕권을 받으러 떠나는 것인데다
왕이 되는 것이 싫기에 사절을 보내어 돌아오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마태오복음은 종말이 가까웠으니 깨어있으라는 그런 맥락에서
열 처녀의 비유와 함께 이 비유를 들려주는데 비해
루카복음은 종말이 금방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고 있기에, 그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루카 19,11)
예루살렘 입성을 앞 둔 시점에서 아마 많은 사람들,
어쩌면 제자들이 더 이제 이 세상 권력은 끝장나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기대에 대하여 루카복음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그렇게 빨리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세상이 그렇게 빨리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 종말이나 기다리며 아무 것도 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열심히 이 세상에 내가 해야 할 것을 하라고 지금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세상 종말과 관련하여 두 극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단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세상사에 대해서는 관심 없고 그래서 재산 다 팔아 교회에 바치고
그저 임박한 세상 종말이나 기다리는 그런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급진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패한 이 세상 권력이 빨리 망하고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아니 하느님 나라를 자기들이 세우려는 그런 부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건강하고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두 극단을 다 반대해야 하고,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부터 잘 살아야 합니다.
어떤 뜻입니까?
하느님 나라는 없거나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 전부인양 살지도 않고
그렇다고 저 세상이 전부인양 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여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느님 나라와 너무도 다르고,
이런 세상을 바꾸어가고 완성해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힘은 너무 작습니다.
겨우 한 미나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두 가지로 실망하거나 더 나아가 절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너무도 다른 이 세상에 대해서 절망하고,
그것을 바꿀 수 있는 나의 힘이 너무 작은 것에 대해서 절망하는 겁니다.
이런 절망을 거슬러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힘을 믿고 희망해야 합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만들면 열 고을을 맡기시겠다는 하느님을 믿고
해야 할 것을 다할 때 우리는 열 고을을 하느님 나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과 희망이 있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