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 입성을 바로 앞둔 주님을 얘기합니다.
말하자면 내일이면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시는 그 울음의 뜻이 무엇일지 생각게 됩니다.
당신이 이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실 것이기 때문에
우시는 것이 아님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파리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 마음 아파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우리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 마음 아파하고 분노합니다.
우리는 테러로 희생된 이들에 대해 애도하고
그 가족들의 큰 슬픔을 보며 같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것을 보고 내 일이 아니라고 슬프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어쩌면 냉혈한보다도 더 나쁜 이기주의일 것입니다.
지난 주 우리 서울에서는 시위로 인해 한 농민이 생사의 기로에 있습니다.
이것을 놓고 어떻게 그렇게 폭력적으로 진압을 하는지 분노하기도 하고,
반대쪽에서는 오히려 시위가 폭력적이고 시위대를 폭도들이라고 합니다.
너무 가슴 아픈 것은 국민을 위하고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이라는 이가 미국에선 경찰이 시민을 쏴 죽여도 괜찮다고 합니다.
이런 이는 그렇게 하는 미국이 선진국이라고 하고,
미국이 하면 다 옳다는 식으로 지껄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고
우리 사회는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용인됩니까?
모든 폭력은 다 안 됩니다.
그러나 더 안 되는 것은 공권력의 폭력입니다.
이번 파리 테러를 놓고 테러집단의 폭력에 대해 모두 분노하고 규탄하지만
이들의 테러를 낳게 한 우리 사회에 대한 자성의 소리도 있습니다.
이슬람에 대한 차별이 자국 내 이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테러집단에 가담케 하고 폭력을 행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사회도 이런 자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시위대의 일부가 과격해지고 폭력을 행사하게 됐는지 말입니다.
아니 더 근본적으로 왜 이들이 시위를 하게 되었는지 봐야 합니다.
우리사회가 가난한 이들의 소리를 막지 말고 들어야 할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법과 제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우리의 차별사회에 대한 반성을 더 진지하게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불평등과 차별을 낳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더 크고 근본적인 폭력성을 우리는 보고 분노할 수 있어야 하고
이 폭력성이 시위를 하게하고 폭력을 행사하게 함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사회의 이런 문제를 보는 사람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자성을 해야 합니다.
공권력이 정당한 의사표현을 막고,
심지어 폭력을 행사하도록 유도하고 조장하더라도
거기에 넘어가 같이 폭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합니다.
쉬운 것이 아니지만 간디가 했던 것처럼 비폭력 저항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 것은
당신이 평화의 길을 제시하셨음에도 그것을 보지 못하는 예루살렘,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과 달리 지금도 종교 때문에 싸우는 예루살렘,
하느님의 이름으로 싸우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안타까워 우시는 것인데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 평화의 길이
감추어져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