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어제는 주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죽임으로써 하늘나라를 폭행한
세속의 권력자를 나무라셨습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말도 듣지 않고
당신 말씀도 듣지 않는 당신 세대의 사람들을 나무라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 곧 예언자를 죽이고
하늘나라를 폭행한 세속의 권력자도 나쁘지만
비록 예언자를 죽이는 불의까지는 저지르지 않을지라도
예언자의 말도 듣지 않고 예언자가 오실 분이라고 예언한
그 분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도 나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례자 요한의 말이나 주님의 말씀이 옳지 않기에,
다시 말해서 말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기에 듣지 않습니까?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우리말에 <비난>이라는 말과 <비판>이라는 말이 있지요.
비슷한 말 같지만 속 내용이 사뭇 다릅니다.
비판이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나쁘다고 하는 것이라면
비난은 말이나 행동 이전에 바로 그 사람이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설적인 비판이라든지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사람과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건설적인 비판을 하지만
그렇지 않고 비난만 일삼는 사람은 비판을 위한 비판만 할 것입니다.
먹고 마시지 않는 요한은 미쳤다고 비난하고,
먹고 마시는 예수님께는 먹보와 술꾼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우리말에 냉소적이라 하고 영어에서 Cynical하다는 말이 있는데
냉소적인 사람, Cynical한 사람이 보통 이러합니다.
이런 사람은 누가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건 비딱하게 봅니다.
이런 사람은 말을 듣고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듣기도 전에 그 사람을 부정하고, 누구건 다 부정을 합니다.
그러니 누구의 어떤 말도 듣지 않고 그래서 회개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라고 제가 남 얘기하듯 하였는데
사실은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저입니다.
제가 정확하게 이런 사람이지는 않지만 일정 부분 겹칩니다.
저는 교만하고 독선적이기에 비슷한 모습이나 태도를 보이는 것인데
제가 자주 떠벌이는 말이 저의 겸손은 교만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그러기에 다른 학자의 주장을 배우려고 하거나 들으려고 하지 않고,
그러기에 제 강의는 누구의 학설이 아니라 독창적이라고 떠벌입니다.
아무튼 이런 사람은 대단한 사람, 잘난 사람이 아니고
장터의 어린이들처럼 미성숙하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누구든 품을 수 있는 큰 사랑을 가진 사람,
어떤 얘기든 나쁜 얘기만 아니면 다 귀 기울이는 겸손한 사람,
이런 사람이 성숙하고 큰 사람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