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는 길을 떠나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성탄을 코앞에 둔 대림 제 4 주일에
세자 요한을 배고 있는 엘리사벳과 예수님을 배고 있는 마리아가 만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들입니다.
그러나 받아야 할 본, 곧 모범은 다릅니다.
엘리사벳은 돌계집이 하느님의 사람을 낳은 것이고,
마리아는 숫처녀가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은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두 분을 본받는다는 것은 두 가지로,
곧 돌계집으로 하느님을 낳는 것도 배우고
숫처녀로 하느님을 낳는 것도 배우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돌계집으로 하느님 낳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무슨 뜻이고,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가 돌계집이 되는 것이지요.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영적 돌계집이 되는 것인데
인간을 낳는 데는 임신 불능자가 되고
하느님을 낳는 데는 임신 가능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어떤 능력이 있습니까?
아니, 어떤 사람이고 싶으십니까?
인간적인 능력이 뛰어나고 그런 능력자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인간적인 능력은 없지만 하느님을 낳는 사람이고 싶으십니까?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인간적인 능력 없어도
하느님을 낳는 그런 영적인 능력자 되고 싶다고 모두 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론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능력지상주의 사회이고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각가지 스펙이라는 것을 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습니다.
실제로 저희 수도자들도 요즘은
성덕으로 하느님 나라를 증거 하기보다
능력으로 세상 사람들과 경쟁하려 하고,
그래서 자기계발을 위해, 자격증을 얻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며 이러저러한 인간적 능력이 많은 저는 비판을 하며
저는 안 그런 사람인 양 착각하지만 실제로 저의 능력을 은근히 과시하고
가진 자로서 안 가진 자이고자 하는 그런 부자놀음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이래가지곤 하느님을 낳을 수 없으니 하느님을 낳는 사람이 되려면
오늘 복음의 엘리사벳처럼 그리고 많은 성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세상의 무능력자가 되어 하느님의 능력을 힘입는 사람이 돼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마리아처럼 하느님을 낳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능력이 있지만 아이 낳기를 포기하고 하느님을 낳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 안에 빈 자궁을 만들고 나를 빈 구유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됩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자기 뜻을 포기하고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공동선을 위해 자기주장을 꺾고 다른 이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고픈 말이 많아도 자기 말은 줄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고,
오늘 제 2 독서, 히브리서의 주님처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모 마리아가 하신 말씀이기도 하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탄까지 얼마 남지 않은 오늘
나의 말은 하느님께 봉헌함으로 나를 빈 자궁과 구유로 만들고
하느님의 말씀은 내 안에 모심으로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또 다른 마리아들이 돼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