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여인 중에 가장 복되다고 엘리사벳이 마리아에 대해 칭송하자
오늘 마리아는 그렇다고 인정을 하면서 그러나 자신을 향한 칭송을
자신에게 큰일을 하신 하느님께로 돌리는 찬미가를 부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 때문에
마리아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큰일이고, 어떤 큰일이 벌어진 것인지 보게 됩니다.
일로 치면 구원사건이 벌어진 것이지만
사실은 구원자 하느님이 찾아오신 거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된 겁니다.
우리가 큰일을 얘기할 때는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안 좋은 뜻의 큰일과 좋은 뜻의 큰일인데
안 좋은 뜻의 큰일은 “큰일 났네 어떡하지?”라고 할 때의
그런 큰일로서, 해결하기가 만만치 않은 큰일을 말하지요.
이런 큰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까짓것!’ 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안 좋은 일은 종종 두려움 때문에 작은 것도
큰 문제로 만들어서 해결치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큰 문제도 작은 문제로 만들어 해결해야겠지요.
그런가하면 좋은 뜻의 큰일도 있는데 보통 인간적으로는
복권당첨같이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행운과 같은 것이거나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는 이루기 힘든 업적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런 큰일에 대해서도 ‘까짓것!’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교만이나 욕심 때문에 ‘요까짓 것!’하는 거라면
그래서는 안 되고 오히려 크게 감사하며 감지덕지해야지만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이 아니기에 ‘까짓것!’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내게 하시는 큰일,
우리가 할 수는 없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큰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저는 우선 회개를 떠올립니다.
우리는, 아니 저는 회개를 해야겠다는 마음조차 갖지 못하거나
회개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시작을 하여도 이루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하느님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것이지만
프란치스코 얘기하듯 시작부터 완성까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럴지라도 회개가 부족한 나를 바꾸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성격이나 습관이나 관계를 바꾸는 것일 뿐
하느님께서 내 안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면
회개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런 회개는 큰일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오시는 것, 이것이 정말 큰일이며
그러므로 회개도 하느님께서 내게 오심으로 완성되어야 하고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함으로 완성되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의 마리아의 찬가를 묵상하면서
빼먹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큰일이 나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구원을 먼저 얘기한 다음
자기처럼 미천하고, 굶주리는 이들을 하느님께서 구원하심을 찬미하는데
자신의 찬미에서 교만한 이, 권세가, 부자를 벌하심도 빼먹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남은 죽건 말건 자기는 떵떵거리며 사는 아주 나쁜 사람들도 많고,
남에게 해코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은 불행하건 말건 나만 행복하면 되고
다른 사람은 지옥가건 말건 나만 천당 가면 되는
그런 개인적이고 내세적인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데
하느님의 구원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을
지금 우리는 기다리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