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그들은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의 이웃과 친척들은
요한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 왜 태어나는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요한의 탄생을 놓고 엘리사벳을 축하하는데
가련한 여인이 늦게야 복을 받고 우세꺼리에서 벗어났음을 축하하고,
아기의 이름도 이스라엘의 인간적인 관습대로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요한의 탄생을 개인의 축복이나
한 가문의 축복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모르는 그들이 요한의 탄생의 의미를
그 정도로밖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도 그들을 나무랄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도 종종 내 자식의 탄생의 의미를 그 정도로 알고 있고,
나의 존재의 의미도 하느님의 뜻 차원에서 알지 못하니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행복을 위해 하느님께서 내게 자녀를 주었지
하느님의 더 큰 목적 때문에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지 못합니다.
우리는 진정 나의 자녀의 탄생 의미와 나의 존재 의미를
즈카르야의 이웃이나 친척들과 달리 잘 알고 있습니까?
얼마 전에 한 형제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수도원에 들어오고 싶은데 아버지의 반대가 너무 심해서
수도원에 들어올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묻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얘기는 한두 번 듣는 것이 아니기에 괘념치 말고 들어오라고,
부모는 자식이 불행할까봐 다 반대하는 것이니
들어와서 행복하게 살면 부모는 마음을 바꾸신다고 얘기해줬습니다.
그런데 얘기를 더 들어보니 그 형제의 경우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식에 대한 집착의 차원이었습니다.
자기의 소유로 자녀를 생각하고,
자기의 만족을 위해 자녀가 있어야 하고 살아야 하며,
그래서 자녀에게도 자기의 인생이 있고
목적이 있다는 것을 도무지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거였습니다.
이런 경우는 너무 심한 경우이지만 우리에게도 이런 측면이 없지 않아
신앙인이라고 하면서도 나의 행복의 차원에서 자식을 봅니다.
비 신앙인과의 차이는 그 자녀를 하느님이 주셨다고 믿는 것뿐입니다.
사실 우리가 제대로 된 신앙인라면 나의 자식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더 큰 뜻 때문에 태어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더 큰 뜻이라면?
우리도 주님의 선구자, 예언자, 증거자라는 것이지요.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제직, 왕직, 예언직을 수행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1 독서 말라키 예언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는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정련하여 주님께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정련하기 전에
물론 그 자신이 먼저 정련을 받게 되겠지요.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이런 얘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처럼 세례를 주는 사람, 정련자입니다.
그러나 남을 세례 주고 정련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세례를 받고 정련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정련은 우리에게 고통일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고통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련키 위함입니다.
이것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