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
저는 지금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습니다.
저희 형제 중의 한 분이 이곳에서 선교하고 계시는데
사제가 아니기에 이곳에 있는 고려인, 교민, 주재원 신자들의
성탄 판공과 특강, 전례 등을 돕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 특강을 하면서 이런 얘기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이슬람 신자들은 예수님의 탄생이 아무 의미 없지요.
그래서 이곳은 성탄이 되어도 캐롤도 없고 장식도 없지 않습니까?
반대로 우리에게는 마호멧의 탄생이 별 의미가 없지요.
그래서 마호멧의 탄생을 축하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탄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예수 성탄을 축하할 일도 기뻐할 일도 없을 겁니다.
나에게 예수님이 태어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탄생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면
2천 년 전 그것도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이 태어난 것을
이곳 사람들처럼 우리도 축하하거나 기뻐하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이 내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제부터 이것을 묵상을 하며 성탄을 준비하였는데 마침
어제 아침 성무일도의 독서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강론의 일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그분이 죄 많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그분이 이 자비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당신은 영원토록 불행했을 것입니다.”
반복되는 “그분이 --하지 않으셨다면 당신은”을 묵상하다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진짜 어떤 인생이 되었을까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쉽게 떠오른 것이 ‘내가 수도자가 되지 않았겠지’였고,
인생에 있어서 엄청 방황을 했을 것이고,
지금과 엄청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며,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처럼 불행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런 생각을 반박하는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나의 선택과 살아온 인생을 정당화하려는 심리의 발로가 아닐까?
우리는 종종 이런 정당화 심리가 발동하지요.
길이 밀릴 때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다 한 길을 선택한 다음
길이 여전히 밀려도 ‘저 길은 더 밀릴 거야’라고 이미 한 선택을 정당화하고,
다시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계속 그렇게 더 가고 난 뒤에는
지금까지 온 것이 아까워 더더욱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곤 하지요.
저도 이런 심리에서 크리스챤이 되고, 수도자가 된 것을 정당화하는 것이지
사실은 예수 없는 삶을 살았어도 행복하지 않았을까?
정말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선택치 않았더라도,
곧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았어도 행복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 없이 살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쩨쩨하고 쫀쫀한 분이 아닙니다.
당신 없이 산다고 해서 행복의 길을 막는, 그런 분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예수님 없이 살아도 예수님이 제시한
그 행복의 길을 가는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
예수님을 부정하고 예수님이 제시한 행복의 길과 달리 가거나
역행하는 사람까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살아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있지만
사랑을 거부하면서 행복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성탄에는 결론적으로 이런 묵상을 하였습니다.
예수 없이 사는 사람 많고, 행복한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도 그들처럼 살 것인가?
아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삶을 다시 선택하겠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내 안에서 재탄생하셔야 하고,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사랑이 내 안에서 탄생해야 한다.
사랑이 탄생하지 않는 그런 예수님 탄생은 사산死産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