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는 창조를 빛이 생겨난 것과 함께 시작합니다. 그 빛은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에게 생명을 주며, 그 생명을 유지해 갈 수 있게 해 줍니다. '생겨라'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모든 것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즉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으며, 오늘 복음에 의하면 그 생명은 또한 빛입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 그 빛이 주는 생명, 그 생명을 주는 말씀이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이 밝게 빛나고, 활기차야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어둠이 있고, 병들어 가고 있으며, 시들시들 해지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세상은 빛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말씀이 살이 되셨습니다.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먹히기 위해서, 먹혀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살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 그 빛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 살을 받아먹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살을 받아 먹지 못합니다. 그 살을 받아먹음은, 우리도 또한 그 살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나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지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고 싶지, 밑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먹는 것은 허용이 되지만, 내가 다른 사람에게 먹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찌보면 이것은 인간의 당연한 모습입니다. 생명을 잃는다는 것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는 것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살이 되어 오신 그 살을 받아먹어야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지만, 그 살을 받아먹으면 우리도 우리의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하기에, 우리는 그 살을 받아 먹지 못합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어둠이 있고, 우리는 병들어 갑니다.
생명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두려움 때문에 생명을 주는 살을 받아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생명은 어디에서 왔는지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느님이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생명을 잃는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그 생명을 다시 주실 것입니다. 즉 우리는 영원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생명을 내어 주면서 생명이신 그 살을 받아 먹으면서, 그분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나를 다른 사람 위에 올려 놓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존재로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나 자신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라고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한 그 빵을 받아 먹음으로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됨을 6장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말씀이 살이 되어 오심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한 번 생명을 허락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둠 속으로,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고통이 있고, 그 고통의 끝은 우리의 죽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씀이 살이 되신 그분을 우리 안에 받아 모실 때, 우리는 고통 중에서도 하느님과 일치하고, 그 고통을 견디어 나갈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려 우리에게 오신 임마누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통마져도 함께 하십니다. 그 함께 하심 때문에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우리를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그분을 맞아들일 수 있고, 그렇게 우리는 그분과 일치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함께 하심이 우리의 작은 기쁨이 되는 나날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