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과 마리아는 길에서 소년 예수를 잃어버립니다. 사흘을 헤메고 나서야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흘이라는 시간은 그들에게 극도의 긴장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외아들을 잃어버린 상실감, 좀 더 아들에게 신경 쓰지 못했다는 자책감 등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당황스러운 것은, 예수를 발견하고 난 이후였습니다. 걱정을 표현하는 마리아의 말에 예수는 왜 자기를 찾았느냐는 대답을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화를 낼 법도 한데, 복음에는 그것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오히려 마리아가 그 모든 것을 마음에 간직하였다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사람들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려움이 없는 가정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보니, 그 인간들이 모여서 사는 공동체에도 이런 저런 어려움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가정 안에서 점점 대화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저것 할 일에 쫓기다보니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습니다. 그것에 더불어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줄 마음의 여유 또한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간단하게 해결될 어려움들이 더 큰 문제로 발전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너무 쉽게 극단적인 결정에 도달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대화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대화를 위한 바탕으로 경청과 신뢰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얼마나 시간을 내느냐는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 보다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얼마나 판단 없이 들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즉 듣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 바로 바로 반응합니다. 끝까지 주의 깊게 들어주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한 두 마디 듣고는 바로 상대방의 말을 끊고 자기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즉 오늘 복음의 마리아처럼 상대방의 말이나 사건을 마음에 간직할 여유가 없어 보입니다. 마음에 담기 보다는 그때 그때 쏟아내기 바쁩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서,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에서, 한 박자 쉬어간다면 조금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 같은데, 우리는 감정을 표현하기 보다는, 감정을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해서 쏟아내곤 합니다.
또한 그러한 경청은 신뢰가 함께 할 때 온전해집니다. 상대방에 대한 믿음 없이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없습니다. 그의 모든 말이 거짓말로 들리고 변명으로 들릴 뿐입니다. 심지어 사실을 이야기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다친 감정만 표현할 뿐, 서로 가까워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대화한다는 것은 서로가 동등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비해서 높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식보다 높지 않고, 남편이 아내보다 높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또한 서로를 존중해 줌을 의미합니다. 서로를 하나의 존중받아야 할 사람으로 인정한다면, 서로 무시하는 것도 없을 것이고, 서로의 목소리를 또한 존중해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모님께 순종하셨듯이, 마리아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부모의 권위로서 해결하기보다는 인내로서 기다려 주었습니다.
그러한 상호 존중이 있을 때, 그리고 구성원끼리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을 때, 우리 가정도 성가정이 될 수 있고, 우리 공동체도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거룩함 속에서 우리가 자라날 때, 인간적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