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외국에서 돌아오니 슬픈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가있는 사이에 제가 오랫동안 기도해준 조카, 그러니까
제 사촌 누나의 딸이 오랜 병상생활 끝에 죽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제가 진짜 슬픈 것은 제 조카가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제 누나가 자식을 먼저 앞세우고 슬퍼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누나는 자식이 먼저 가고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고통을 너머 부끄러움이고 치욕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니 옛날부터 불효 중에 제일 큰 불효가
부모보다 먼저 죽는 거란 말이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저희 누나를 생각하면서 오늘 축일을 생각하니
어린 자식을 잃은 어미들의 고통이 얼마나 클까 더 실감이 납니다.
실로 제 조카나 예수님 당시의 어린 아이들의 죽음은
제 누나나 어미들의 슬픔에 비교할 때 크게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이 세상을 더 사는 것이 슬픔이고 불행이지
일찍 죽어 하느님께 가는 것은 오히려 기쁨이고 행복이며
불행하게 이 세상을 오래 사는 것보다는 말할 것도 없이 훨씬 더 낫지요.
그러므로 어린 아이의 죽음을 불행이라고만 생가지 말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무죄한 많은 사람이 죄인들의 폭력에 의해 죽어왔는데
그런 죽음 중의 하나이고, 똑 같이 그렇게 돌아가신 예수님 죽음,
곧 희생된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죽음의 전조이며 동참입니다.
지금 저희 수도원에는 작년의 구유 이상으로
아주 의미 있는 구유가 꾸며져 있습니다.
구유가 세월호의 배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진으로 보여드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니까 아기 예수는 세월호 안에 있는 아이들이고,
뒤집으면 세월호의 아이들이 바로 아기 예수라는 얘기이며,
세월호 가족들은 아기 예수 옆의 요셉과 마리아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린이들의 희생과 죽음은 하나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죽음이란 죄 때문에 벌로 죽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죄의 벌로 죽는 죽음도 있지만 그런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죽는 죽음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또 무죄한 어린아이들의 죽음은 또 다른 증거이며 고발도 됩니다.
죄 많은 사람이 무죄한 사람을 죽이는 세상의 폭력성에 대한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 뒤에
하느님 나라는 계속 폭력을 당해왔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듯이
실로 하느님 나라와 반대인 이 세상의 힘들은 무죄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줄곧 폭력으로 다뤄왔고, 그렇게 희생으로 내몰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축일을 지내며
세월호 희생자와 가족을 비롯하여 무죄하게 죽은 현대의 많은 희생자들을
어린 양이 희생되신 것처럼 희생된 것임을 알고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이렇듯 무죄한 이들을 희생으로 모는 현시대의 폭력성에 대해서
고발도 하며 회개를 위해 기도도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