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된 주제는 부르심입니다.
사무엘기에서는 사울이 부르심을 받고
복음에서는 레위가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무엘기에서 좋은 가문의 잘 생긴 사울이 부르심 받는 것과 달리
복음에서는 죄인으로 여겨지는 세관원 레위가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래서 생각게 됩니다. 왜 죄인을 부르셨을까?
누가 봐도 호감 가는 사람을 부르지 않고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부르셨을까?
이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하느님은 사람을 보고 부르시지 않고,
사람 때문에 부르시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부르시지 않고 당신의 기준으로 부르시며
세상의 인사발탁과도 다르다는 뜻입니다.
호감 가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
한 마디로 좋고 유능한 사람을 뽑는 세상 인사와 다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걸어서 입성하셔도 되고 굳이 타고 입성하실 거면
적토마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이 보기에 좋을 텐데
굳이 한 번도 누굴 태워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굳이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겁니까?
그것은 수난 받고 죽으시러 들어가시는데 적토마는 어울리지 않고
어린 나귀가 제격이기에 그러신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귀가 잘나서 타고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제 첫 미사 강론 때 했습니다.
사제란 주님과 등지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늘 등에 업고 다니는 존재임을 얘기한 다음
주님께서 왜 유능한 사람들을 놔두고 저를 당신의 탈것으로 뽑으셨냐 하면
주님을 등에 업고 자기 과시나 하고 신자들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가문도 좋지 않고 부족한 저를 당신의 탈 것으로 뽑으신 거라고 얘기했지요.
오늘 주님은 레위를 죄인이니까 부르시고 죄인을 위해서 부르십니다.
누군지 모르고 부르시거나 레위가 잘나서 뽑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레위가 세리라는 것을 잘 알고 부르시고 세리이기에 뽑으신 것입니다.
사실 죄인 아닌 사람이 없고 그래서 죄인 아닌 사람을 부르실 수도 없지요.
다만 자기가 죄인 아니라고 머리를 꼿꼿이 세우는 죄인과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에 고개 숙이는 죄인이 있을 뿐인데
머리를 꼿꼿이 세우는 죄인을 뽑으면 자기가 잘나서 뽑혔다고 생각할 거고
고개 숙이는 죄인을 뽑으면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임이 드러나겠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드러나도록 레위를 부르시고,
레위를 보고 다른 죄인들도 힘과 용기를 얻도록 레위를 뽑으신 겁니다.
레위를 보고 나도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다른 죄인들이 깨닫고,
레위를 보고 나도 다시 출발할 수 있겠구나 하는 용기가 생기고,
나도 주님을 내 집에 모실 수 있겠구나 하는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죄인도 사랑하시고 죄인의 사랑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나도 죄인이지만 부르심 받았고 당신을 따르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르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을 떠나거나 주님과 떨어지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사랑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 주님을 결코 떠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주님처럼
의사가 더 필요한 병자들을 살피는 영혼의 의사가 돼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