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의 능력을 보아야 예수님을 인정하겠다는 마음이지만, 그런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믿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기적 조차도 순수하게 예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다른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서 몇 명은, 예수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렇듯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내가 너를 안다는 선입견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의 동일 구절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의 가족들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형제들의 이름까지도 언급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내가 본 예수의 어린 시절 모습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변화된 모습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즉 내가 너를 안다는 선입견은 현재의 상대방의 모습을 가려서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에도 정당한 이유는 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매번 새롭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려 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듯 모든 사람을 대한다면, 사람을 만나는 그 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그 사람에 대한 기초 지식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이 더 효율적입니다.
문제는 한 번의 노력으로 얻은 그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 두 번 다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얻은 모습, 그 틀 안에 그 사람을 가두어 놓고 변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생각했던 틀에서 벗어나는 모습에 대해서, 그것은 네 모습이 아니라고 오히려 화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고, 그 대상은 이름을 지어준 존재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렇기에 구약에서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상대에 대해서 안다는 생각은, 상대방을 내 지배 아래에 둔다는 생각과 연결됩니다. 즉 내가 너를 안다는 선입견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없애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사람은 숨쉬고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즉 매순간 변화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기에 이미 죽음 존재, 화석과 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변화를 열린 마음으로 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상대방의 다른 모습도 알아갈 수 있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상대방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상대방을 알면서 그를 내 지배 아래에 두려고 하기 보다는,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