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각기 음모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독서 예레미야서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전하고 있고
복음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도 주님도 그 음모를 다 알고 있습니다.
숫제 모르면 좋을 텐데 예레미야는 자기가 복 빌어주고,
하느님의 분노 면하게 하려고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이런 음모를 꾸미고 있음에 억울해 하며 한탄을 합니다.
예수님도 다를 바 없고 그 억울함은 더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 억울함 때문에 한탄치는 않으십니다.
어쩌면 그들이 그러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각오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태도를 보시고는 한탄을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대목에서는 한탄하셨다는 표현이 없지만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실 때 쿨쿨 자는 제자들을 보시고는
“이렇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하고
살포시 서운함과 한탄을 표시한 적이 있으시지요.
오늘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와 함께 자리 청탁을 하기 전에
주님께서는 세 번째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셨잖습니까?
수난 예고를 한 번 하고, 두 번 해도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다시 세 번째로 예고를 하신 것인데 그 말에 침이 마르기도 전에
자리 청탁을 하고 그것도 어머니를 찔러서 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스럽고 한탄스러우셨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런 제자들에 대해 그런 느낌이 들기보다는 슬펐습니다.
제가 제자들보다 나은 사람이라면 저도 한심하다 하고 한탄도 하겠지만
저도 같은 인간이고, 저는 제자들보다 더 한심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제자들처럼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다.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시러 예루살렘에 가신다는데
수난과 죽음은 들리지 않고 그 수난과 죽음이 외려 영광으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왜 못 알아듣고, 왜 달리 알아듣습니까?
제 생각에 소아와 자기애에 갇힌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하지요.
뒤집어 얘기하면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들리고,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고 그것을 하려고 하며,
사랑하면 할수록 듣기 싫은 것도 들리고 싫은 것도 하려고 하지요.
그러니까 제가 저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추측을 하면
“그들은 그를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는 말씀 중에서
사람의 아들이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라는 말씀만 귀에 들어왔을 것이고.
그래서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겠지만 결국은 권력을 잡을 것이라는 뜻으로,
그러니까 권력을 잡는데 어찌 일시적인 어려움이 없을 수 있겠냐는 뜻으로
대수롭지 않게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고 주님께서 물으셨을 때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하지만 그들이 생각한 것은 축배의 잔이었을 겁니다.
저를 봐도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진정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듭니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제게 주신 것을 마다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주님 때문에 제가 하기 싫은 것을 자발적으로 하거나
주님 때문에 하고픈 것을 안 하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저를 위해 죽으실 때
저는 제자들처럼 제 좋을 대로 할 궁리만 하고 또 좋을 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저뿐 아니라 인간이란 이런 존재인가 생각하며 슬퍼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