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제가 자주 비교하며 차이를 생각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비교이고
<싫어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의 비교인데
그 차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싫어하면 버리고, 미워하면 죽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 지나친 표현이라고 생각하실 분이 많고,
실제로 싫어한다고 다 버리고 미워한다고 다 죽이지는 않지요.
물건은 싫어하면 버리고 애완동물도 싫어지면 버리지만
싫어하는 사람이라 하여 그를 버릴 사람은 없을 것이고,
버릴 수 없기에 버리는 대신 무관심할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움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불완전한 사랑으로서의 미움이 있고,
사랑이 전혀 없는 완전한 미움도 있지요.
불완전한 사랑으로서의 미움이란 애증이 엇갈리는,
다시 말해서 미움과 사랑이 같이 있는 미움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은 뒤집어 보면 사랑하고 있거나
적어도 사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전혀 사랑이 없어서 무관심하기까지 한다면
무엇하러 그렇게 괴로워하면서까지 미워하겠습니까?
실제로 미움의 고통이 두려워 무관심해버리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사람은 사랑할 힘이 너무도 없어서 미워할 힘도 없으며
고통이 두려워 미워하지도 못하는 겁쟁이들입니다.
헌데 사랑이 전혀 없어서 미워하지도 못하고 무관심해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사랑도 전혀 없고 그렇다고 무관심할 수도 없기에 정말로 미워하는 사람,
곧 완전히 미움밖에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미워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데
죽이지 못할 경우 어떻게든 그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만 파괴할 수 없을 경우 자신을 파괴하면서도 파괴하려고 하지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적政敵에 대한 미움입니다.
옛날 이승만 대통령이 김구, 신익희, 조봉암을 정적이기에 제거하고
박정희, 전두환 같은 대통령이 정적인 김대중 대통령을 죽이려 했으며,
지금도 이와 비슷한 미움의 광기와 살기가 느껴집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얘기에서도 이런 비교를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에 대한 시기 질투 때문에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고 그래서 죽일 음모도 꾸미지만
그래도 사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어서 팔아버리는 거로 생각을 바꿉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 비유를 들려준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일말의 사랑도 없고 자신들의 정적인 예수님을 살해할 겁니다.
이들은 예수님 이전에 예언자들을 그렇게 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예언자들도 그들을 정적으로 생각지 않았지만
자기들이 그저 예수님과 예언자들을 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 나라를 얘기한 것이
그들의 이 지상 기득권을 무너트린다고 위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의 포도밭인 이스라엘을 자기들의 포도밭으로 만들려는데
주님과 예언자들이 이 포도밭은 하느님 소유라고 하니 위협을 느낀 겁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것을 강탈하여 내 것으로 소유하는 작은 도둑들은 아닌지
성찰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