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순절이 회개의 시기이고 그래서 오늘 비유의 한 말씀에 초점을 맞춘다면,
다시 말해서 “그제야 제 정신이 든”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춘다면
회개는 <제 정신 차리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이때 하느님은 정신을 차리게 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제 정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은 제 정신이 나가고 다른 정신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 다른 정신이 나가고 이제 제 정신이 다시 들어왔다는 얘기이지요.
우리가 정신이 나가고 썩어빠진 정신으로 가득할 때를 보면
자기가족이니 자기본분이니 책임이니 하는 것들을 다 팽개치고
다른 무엇에 현혹이 되는데 그것이 보통 기만적인 만족들입니다.
부모를 팽개치고 여자들 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여자도 사랑의 상대가 아닌 쾌락의 상대로만 사귀며,
사랑을 팽개치고 돈이나 권력과 같은 것에서 만족을 구하고
하느님 나라의 의와 진리를 팽개치고 이 세상의 허영을 추구합니다.
이런 썩어빠진 정신을 버리고 제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쓰시는 방식은 <내버려두기>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시고,
그래서 가지고 있던 것을 다 잃게 내버려두시고,
바닥까지 내려가는 고통의 쓰라림을 겪게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고통당할 것을 뻔히 알기에 안쓰러운 마음에 부모가 못하게 하면
자식은 내내 탓을 부모에게 돌리고 불평불만을 할 뿐 아니라
깨닫지도 정신 차리지도 못할 것이기에
너무 걱정이 되고, 너무 마음이 아프지만 내버려두는 것인데
이것이 아버지의 자비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실 우리의 자비와 사랑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보다 작기에,
작다는 것이 적당치 않다면 약하기에 제 정신 차리게 하는데 실패합니다.
실패 안 하게 하고, 고생 안 하게 하는 것이 크고 강한 사랑이 아니라
실패에서 일어나게 하고, 고생을 통해 깨닫게 하는 것이
더 크고 강한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는 머리로는 다 압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음 약해서 사랑하는 사람, 특히 사랑하는 자녀가
실패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보기 싫고, 보는 것을 못 견뎌 합니다.
그러나 실패와 고통을 통해 잘못을 깨닫고 제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 실패와 고통을 지켜보며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패하고 돌아오는 아들, 제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는 아들을
오늘 비유의 아버지처럼 멀리서도 알아보고 마중 나가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비유의 아버지는 아들의 고통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고,
아들이 돌아올 때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기에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멀리서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얘기할 때
죄 지은 아들을 용서하고 환영하는 자비와 용서를 크게 얘기하지만
사실 이것보다 더 큰 자비와 용서는 내버려두는 자비와 허용입니다.
왜냐면 재산을 다 가지고 떠나는 것을 허용할 때
그때 이미 부모는 자식이 겪을 고통에 함께 하기로 각오를 한 것이며
정신 차리고 돌아온다면 용서할 것까지 미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처음서부터 끝까지이지
나중에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님을 감사하는 오늘이고,
그래서 죄 짓고 고생하도록 내버려두신 것까지 감사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