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어제와 오늘의 화답송은 모두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순 제 3 주일의 주제는 <주님은 자비로우시지만
늘 너그러우시지만은 않으시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그러우시다가도 끝까지 회개치 않으면 벌을 주시는 분이시며
벌을 주실 때는 아주 가혹하신 분이시라는 얘기이고,
그런데 어제 보았듯이 벌주심과 가혹함도 자비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자비가 없이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인데
자비 없이 또는 사랑이 없이 벌주는 사람과 다르다는 얘깁니다.
사실 자비나 사랑이 없이 벌주는 것은 벌을 주는 것이기보다는
단죄하거나 미움이나 분노 때문에 상대를 파괴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고백성사를 주다보면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벌을 준 것>과 <화풀이한 것> 사이에서 경계가 모호한 경우를 듣습니다.
그렇다면 벌과 화풀이를 가르는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앞서 봤듯이 사랑에서 비롯됐느냐 미움에서 비롯됐느냐,
회개를 목적으로 두고 했느냐 그저 감정대로 했느냐입니다.
아무튼 하느님은 자비로우시지만 무한정 너그러우신 것은 아닙니다.
그 너그러우심이 죄도 괜찮다고 하시는 너그러우심이 아닌 겁니다.
우리는 죄는 미워하고 사람은 사랑해야 하는데
단호해야 할 죄와 너그러워야 할 사람 사이에서
그 감정과 그 대처가 뒤바뀐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 사랑하시기에 그 뒤바뀜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은 끝까지 사랑하시고 죄는 끝까지 미워하시기에
적당히 벌을 주시고 끝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마치 의사가 암 덩어리를 제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환자를 진정 사랑하는 의사이고 그래서 꼭 고쳐주고자 하는 의사라면
암 덩어리를 대충 잘라내고 덮지 않고 그야말로 완전히 다 제거하겠지요.
지금은 병원 가서 다 마취하고 종기를 수술하곤 하지만
저 어렸을 때는 종기를 터트려 손으로 짜거나
칼을 불로 달궈 소독한 뒤 마취 없이 도려내곤 했는데
이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면 마음 약한 사람은
모질게 그리고 깔끔하게 수술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말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죄를 떼어내시기로 한 번 작정하시면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이를 악물고 죄에 대한 벌을 내리시는 겁니다.
이런 하느님을 노자 식으로 얘기하면 천지불인天地不仁입니다.
하늘과 땅은 인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천지가 인간을 따르지 않고 인간이 천지를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사람이나 사람의 행위가 하늘과 땅의 이치에 어긋나면
인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치에 맞을 때까지 냉정합니다.
하느님은 “나는 있는 나다.”라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무엇을 위해 있거나 무엇에 의지하거나
무엇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분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를 짓고 자기들 마음에 들게 해주지 않는다고
늘 불평불만을 하는 백성이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
하느님이 백성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하고,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하기에
죽어 널브러지게 하시고 그런 마음을 바꿀 때까지 벌을 내리십니다.
자기본위적인 암 덩어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인간은 영원히 죽기에
하느님께서는 이 암 덩어리를 무자비하게 제거하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