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다니엘서의 아자르는 이스라엘의 딱한 처지를 주님께 아뢰는데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비유로 든 야비한 종과 비교가 되면서
참으로 아름답다는 감동과 더불어 닮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아자르는 그저 값싼 동정심이나 얻으려고 죽는 소리를 하지 않고
자기들이 이렇게 된 것은 죄 때문임을 진심으로 참회를 하며
죄의 결과인 이 어려운 처지도 피하지 않고 마땅히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자기들에게 예언자도 지도자도,
번제물이나 희생제물도, 자비를 청할 곳도 없지만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은 있음을 얘기한 다음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의 종과 비교할 때 얼마나 진실하고 당당합니까?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의 종은 얼마나 야비하고 비굴합니까?
그래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참회건 용서건 진실해야 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함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치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사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참회를 하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 용서치 않으면 그 용서는 시늉이거나
한두 번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속으로는 용서할 마음이 없는데 용서해야 한다니 겉으로 시늉하고,
한 번 가까스로 용서할 수밖에 없다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강조하거니와 무제한 용서할 수 있으려면
참회와 용서가 마음에 가득해야만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참회를 해야만 먼저 주님께 용서를 진심으로 청할 것이고,
마음으로부터 용서를 청해야만 하느님의 용서를 제대로 체험할 것이며,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을 용서할 것입니다.
그러니 관건은 어떻게 해야 참회와 용서가 마음 가득할 수 있을지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참회와 용서가 마음 가득할 수 있겠습니까?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은 내 힘으로만 되기 어렵지요.
스스로 자기 영혼을 부술 사람은 드물어도 아주 드물기 때문입니다.
자기 손등을 자기가 망치로 내려쳐 부수는 것이 어렵듯이
자기 영혼을 자기가 부수는 것은 어렵기에 하느님께서 부숴주십니다.
얼마 전 누가 식사 초대를 해 갔는데 초대를 해놓고는
체해 가지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관을 터 주었는데 엄지손가락 두 개만 땄는데도
엄지발가락 두 개는 아프고 겁나서 못 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이 따주는 것도 겁나 못 따겠다고 하니 자기 스스로는 아예 못 따겠지요.
사관 하나 스스로 따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니
영혼을 부수는 것은 더더욱 스스로 부수지 못하고,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영혼을 부수어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주님께서 부수어 주실 때
겸손해진 마음을 우리가 지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내 영혼을 부수시냐고 거역하거나 원망치 않고,
아자르처럼 그리 됨이 마땅하기에 부수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부수시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겸손해진 마음 말입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주님께서 정말로 제 영혼을 부수실 때
저는 과연 거역치 않을 뿐 아니라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