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바오로 사도의 제 2 독서의 말씀들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그래서 저를 무척 당황케 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는 말씀이나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라는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들이지요.
우리 인간은 사는 게 죄라는 말처럼 참으로 존재가 곧 죄의 존재이고,
살며 하는 짓이 모두 죄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인데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게 하시고, 죄로 만드셨다니 참으로 언어도단이지요.
이는 마치 내가 죄를 지은 것 때문에 부모가 죄인이 되는 것과 같지요.
부모는 자녀의 죄를 다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실 뿐 아니라
자녀가 죄를 지으면 사람들도 다 부모에게 손가락질을 하니
정말 자녀인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부모를 죄인으로 만들곤 하지요.
그리스도께서도 이러 하시다는 것이니 나 때문에 죄인이 되시는 것이
한 편 너무도 황송하고 죄스러우면서도 다른 한 편 큰 사랑임을 느끼지요.
하느님과 화해하라는 말씀도 참으로 말이 되지 않지요.
우리 인간끼리는 화해하라는 것이 말이 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과 화해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인간은 오늘 복음의 작은 아들처럼 일방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고,
그 죄를 알고 난 뒤에는 아버지께 돌아가 용서를 청해야 할 뿐인데
마치 하느님과 우리 관계가 동등하고, 관계의 어긋남이 상호책임인 양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지요.
진정 하느님은 오늘 복음의 아버지처럼 우리에게 잘못하신 적이 없으시고,
자식이 원하는 대로 다 하게 해주신 분이시며
언제고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아버지 입장에서는 풀어야 어긋난 관계, 안 좋은 관계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앞서 보았듯이 아버지는 자식의 모든 죄의 원죄이십니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지었다고 하지만 원죄의 원죄
곧 The Sin of Original Sin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의지의 존재로 인간은 만드신 분이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셨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고통 중에 있을 때에는 왜 나를 낳으셨냐고,
죄를 짓고 난 뒤에는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원망을 할 수 있게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죄를 깨닫고 용서를 청하여
당신이 우리를 용서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시기 전에
우리가 하느님께 대한 이런 원망의 마음을 거두고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을 용서하고 화해할 마음을 갖게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화해란 나의 모든 고통과 불행에 대한 하느님의 원죄를 내가 용서하고,
엉클어지고 끊어졌던 관계를 풀어버리고 좋은 관계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원망을 거두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분이고
그래서 관계를 푸는 주도권도 우리 인간에게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 편에서는 화해고자시고 할 것이 없고
우리가 원망을 거두고 화해하기만 하면 화해는 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우리가 당신과 화해하기를 바라실 뿐 아니라
세상에서 우리가 당신 화해의 사절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화해의 직분을 우리에게 맡기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죄인임을 느끼는 우리라면 이런 은총이 너무도 큰 사랑이기에
한 편으로 감사하면서도 다른 한 편 황송해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