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오늘 복음의 병자는 서른여덟 해나 앓았다고 합니다.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서른여덟 해나 앓았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요?
큰 병을 앓은 적도 없고, 오래 아파보지도 않은 저로서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이런 분들이 많을 텐데
이분들의 고통이 얼마나 클까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더 안쓰럽고 미안한 것은 이들의 오랜 병상생활에 대한 것보다
서른여덟 해나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벳자타 못을 들른 사람이 하루 100명이라고 쳐도
1년이면 3만 6천 5백 명이 이 병자 곁을 지나갔을 것이고,
38년이면 138만 7천 명이나 지나갔는데 그 중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거나,
본 사람이 있었다 해도 아무도 그를 못에 데려다 준 이가 없었다는 거지요.
어찌 그 많은 사람들 중 아무도 그를 보지 않고 데려다 주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저는 그들 중 하나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지금 얘기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오늘 복음은 저를 포함하여 우리 인간의 간과看過,
곧 지나쳐 봄, 무관심, 무심함, 사랑 없음 등에 대해서 반성케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우리가 못 보는 것을 보시는 주님을 보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못 보고, 우리가 간과하는 것을 어떻게 보시는 겁니까?
앞에서 봤듯이 우리의 못 봄이 무관심, 무심함, 사랑 없음의 간과였고,
여기에는 의도적인 차원과 비의도적 차원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의 보심도 사랑의 의도적인 차원과 비의도적인 차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종종 의도적인 간과, 다시 말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일부러 외면을 하곤 합니다.
그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것이 싫어서 그럴 수도 있고,
그들을 보면 안 도울 수 없으니 일부러 못 본 체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주님은 병자를 사랑으로 보시고
병자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즉시 알아보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라고 얘기하지요.
그러니까 보심은 주님 사랑의 의도적인 차원을 드러내고
아심은 주님 사랑의 능력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못 보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는 것 안에서
저는 오늘 아주 특별한 차원의 섭리를 묵상코자 합니다.
말하자면 전화위복적이고, 비의도적인 섭리 말입니다.
우리가 못 보는 것은 분명 우리의 큰 잘못이고 죄이지만
구원의 주님을 만나기 위한 비의도적인 섭리가 아닐까 생각해보는 겁니다.
저는 여기서 주님의 구원이라고 하지 않고 구원의 주님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누가 그를 못에 데려다 주고 그래서 인간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면
그는 구원 체험을 하지만 주님 체험은 못했을 수도 있는데
인간의 구원을 못 만났기에 구원의 주님을 만난 것이지요.
우리 인생에서 우리는 이런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내 좋을 때 내 주변에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내 처지가 안 좋아지자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설상가상 중병까지 들어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때 우리가 명의를 만나거나 좋은 사람을 만나면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느님 사랑도 체험치 못할 터인데
이렇게 아무도 없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만나게 되지요.
정말 어려울 때 하느님께서 우리 주변에 사람 없도록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전화위복으로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
이것이 비의도적인 하느님의 섭리라고 제가 오늘 묵상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묵상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