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저는 음악방송을 고정하여 듣습니다.
어제 아침 방송은 민족에 따라 3월의 뜻들이 다름을 소개했는데
영어의 March는 그리스의 전쟁의 신 Mars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겨울과 봄이 한창 싸우는 그 한 가운데 있는 달이라는 뜻이고,
인디언 체로키 족에게 3월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
아라파호 족에게는 ‘연못에 물이 고이는 달’이라고 한다지요.
같은 3월을 이렇게 달리 보는 것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우리에게 3월이란 어떤 달일까 생각해봤는데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이니 주어로 하느님이 꼭 들어가야 할 것이고,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다는 뜻이 들어가면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시작하는 달’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시간이나 때는 자연주의적인 때도 아니요,
인간중심적인 때도 아닌,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우리에게 때란 하느님께서 시련을 주시는 때이기도 하고
오늘 이사야서가 얘기하듯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때,
곧 은혜의 때이기도 하고 구원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에게 이 때가 바로 그런 때입니까?
오늘 주님께서 “지금이 바로 그 때다.”고 말씀하시는데
지금이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때인데
내게도 지금이 은혜의 때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하는 말이 <물들어 올 때 노 젓자!>입니다.
물 있을 때는 가만있다가 물 빠지기 시작할 때에야
‘아이쿠, 이제 노 저어야겠네!’ 하고 노 저으면
그때는 아무리 열심히 저어도 헛것입니다.
하늘에서 햇빛을 내리면 얼른 햇빛을 받고
하늘에서 비를 내리면 얼른 양동이로 비를 받아야지요.
하느님의 때가 우리의 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신앙인이고,
무늬만 신앙인이 아니라 실제로 신앙인입니다.
요즘 매일 아침 성무일도 초대송을 노래할 때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후렴을 바치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가 우리에게는 듣는 때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가
우리에게는 말하지 말아야 할 때라는 뜻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딴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되는 때라는 뜻이지요.
오늘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거든 그 목소리를 듣고,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면 다시 살아나고,
오늘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은총을 가득 받는 날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