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그러자”라는 말로 오늘 탈출기 마지막 문장은 시작됩니다.
“그러자”라는 말은 보통 앞에서 한 말이나 행동에 대한
대응적인 말이나 행동 사이에서 앞뒤를 이어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탈출기의 “그러자”는 모세가 하느님께 한 말과
그 말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이어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보면 두 가지의 “그러자”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병이 나았다거나
주님께서 잠잠해져라 하시자 바다가 잠잠해졌다거나
주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소녀가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되는 순종적이고 긍정적인 “그러자”입니다.
주님께서 수난예고를 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한 것이나,
주님께서 반박하시자 유혹자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것이나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던지려고 한 것 등은
주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불 순종적이고 부정적인 “그러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탈출기는 하느님께서 모세의 말에 순종하는 “그러자”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단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하시며 벌하려는데 모세가 간청을 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벌하려던 계획을 접으시고 모세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이런 묵상을 합니다.
하느님과 우리 인간 중에 누가 더 순종적일까?
하느님이 우리 인간에게 더 순종적이실까,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더 순종적일까?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께 가납되지 않을 때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생각지 않고
그저 내 기도 하느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신다고 불같이 화를 내곤 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합니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하느님께서 대부분 우리에게 순종하셨지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한 적은 별로 없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을 이기는 무기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가 하느님을 이기게 하는 아킬레스건입니까?
무엇이 우리에게 질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큰 약점입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느님을 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깡패와 같은 부모가 아니라면 자식이 원하는 것을 말하기도 전에
무엇이 자식에게 좋고 필요한지를 알고 미리 원하는 것을 해주고,
해롭고 위험한 것은 제발 하지 말라고 간청을 하지요.
그러면 자식은 목이 뻣뻣해져서 사랑의 말을 간청으로 여기고
내가 알아서 하니 잔소리나 간섭하지 말라며 어깃장을 놉니다.
가장 좋은 것을 먹이려는 엄마에게 안 먹겠다고 떼쓰다가
사정사정하면 선심 쓰듯 한 입 먹어주는 어린애처럼 말입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렇게 고발하십니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모습을 본 적도 없다.”
“너희는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이런 주님의 말씀 앞에서 목은 뻣뻣하고 사랑은 없는 내가 아니라고
강변하거나 변명할 수 없는 나임을 인정하는 것이 그나마 저의 겸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