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오늘 복음에서 하신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거라.>
<다시는 죄짓지 마라.>
이 세 말씀에 사람들은 다르게 방점을 찍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단죄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느님의 용서에,
어떤 사람은 가라는 하느님의 풀어주심, 곧 해방에,
어떤 사람은 죄짓지 말라는 하느님의 준엄한 명령에.
그런데 저는 오늘 <가거라.>에 방점을 찍겠습니다.
제가 프란치스칸이기에 가라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도 없지 않지만
오늘 사순 제 5 주일 메시지가 <가거라.>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순 제 5주의 메시지는 과거에 죄를 참 많이 지었는데
앞으로는 죄 짓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순 5 주일의 가라는 것의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서 죄녀에게 가라고 하셨는데 어디로 가라시는 겁니까?
단순히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까?
당신을 떠나가라는 것입니까?
설혹 주님은 당신을 떠나가라고 풀어주신 거라고 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떠나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겠지요.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라는 것은 우선 과거를 떠나 미래로 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지 말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말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바오로 사도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떠나지 못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미래지향적이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좋은 것을 마련해 놓고 그리로 오라하셔도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좋아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더 좋아서,
그 초대를 따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기에 거의 모든 죄는 다 미래지향적인지 않은 죄입니다.
그러나 미래지향적이지 않는 것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지향적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안주적입니다.
꿀단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현실안주적이라면
죄책감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과거지향적입니다.
그런데 꿀단지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되는데
죄책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지요.
보통 좋은 것은 놓기 힘들고 싫은 것은 버리기가 쉽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죄책감은 그렇게 괴로워하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을 죄인, 곧 죄의 사람으로 단죄하기 때문입니다.
단죄란 과거의 죄 때문에 자신을 죄의 사람으로 낙인찍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죄녀를 단죄하지 않으신 것처럼
자신이든 남이든 단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죄를 지은 사람이지 죄의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 번 죄를 지었다고 계속 죄를 지으라는 법이 없지 않습니까?
과거의 죄를 주홍글씨처럼 영원히 달고 다닐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죄에 머물러 있을 죄의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마련하신 하늘나라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는 것은 하늘로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에로 나아가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그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늘로 가는 것이 그저 이 세상으로부터 염세적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부터 부활을 살며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이나 부모를 만나러 가는 것이라며
그 가는 길이 비록 힘들더라도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고,
설사 많이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끝까지 달려가야 할 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