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봅니까?”
오늘 베드로 사도는 불구자를 고쳐준 것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와 어떻게 된 건지 유심히 살펴보는 것에 대해
왜 유심히 보냐고, 어떻게 보면 그러지 말라는 투로 말합니다.
그런데 왜 유심히 보냐는 말이 그렇게 보지 말라는 얘기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고,
또 무심히 보고 지나치게 해서도 안 되고,
사람들이 우리를 유심히 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의도처럼
사람들이 주님은 보지 않고 우리를 보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사람들이 주님을 보지 않고 베드로를 보거나 치유 받은 불구자만 본다면
그렇게 보는 사람들도 문제이지만 그렇게 보게 하는 베드로가 더 문제지요.
일반 사람들이야 신앙의 눈이 없으니 그럴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신앙인이고, 더욱이 주님의 체험을 강하게 한 베드로 사도라면
사람들 시선이 주님이 아니라 자기든 남이든 인간에게 쏠리게 해선 안 되고,
자기에게 쏠리게 해서는 더욱 안 되며, 일부로 그래서는 더더욱 안 되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무심히 보아 넘기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처럼 주님 부활의 증인이고,
그래서 주님 부활을 증거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제 한겨례 신문을 보신 분은 저희 형제가
신문 한 면에 크게 실린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산청 성심원에서 오래 사신 유의배 알로이시오 형제지요.
“한센인 대부 36년, 이승에서 천국까지 맨발 봉사”
이런 제목으로 알로이시오 형제에 대한 기사가 실렸고,
얼굴과 함께 양말을 신지 않은 그의 맨발 사진을 올렸지요.
그것을 보면서 맨발이라면 저도 36년 이상 신지 않고 다녔는데
저의 맨발은 증거가 되지 못하고 알로이시오 형제의 맨발은
사람들에게 증거가 되는구나 하면서 속으로 웃으며
그러나 증거에 대한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칸들이 맨발로 다니는 것, 특히 겨울에 맨발인 것을 보면
희생이나 고신극기 때문에 그러는 줄 알고 안타까워하기도 하는데
본래 프란치스칸들이 맨발로 다니는 것은 고신극기 때문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가 복음에서 제자들 파견 얘기를 들을 때
발에 신발도 신지 말라는 말씀대로 즉시 신발을 벗은 것처럼
우리 프란치스칸들도 복음을 그저 읽고 듣지만 말고
프란치스코처럼 복음을 살고 증거 하겠다는 의지의 표시지요.
그런데 알로이시오 형제는 맨발이 증거가 되는 삶을 살았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무심히 보고 지나치지 않고 그것에 주목하였고
저는 그런 삶을 살지 못했기에 저의 맨발은 증거가 못 되었던 거지요.
알로이시오 형제가 방송이나 언론에 나온 것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수십 번이나 되는데 이 형제가 이런 취재에 응하는 것은
인기를 끌기 위해서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 거였다면 오히려 사람들이 금세 알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글쎄, 우쭐하는 마음이 속으로 조금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형제의 삶은 방송이나 언론에 나오기 전이나 후나
전혀 달라진 것이 없으며 지금도 똑같은 삶을 한 결 같이 살지요.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유심히 보게 하고,
그에게서 복음적인 삶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이론이 아니라 삶과 실천으로 느끼게 하는 겁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도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우리도, 특히 프란치스칸이라면 우리의 삶이 증거적인 삶인지
복음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사는 삶인지 돌아보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