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너희 집 짓는 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이십니다.
중국은 아직도 겨울이어서 아무런 꽃이 피지 않았지만
지금 저희 수도원의 산수유, 목련, 진달래는 이미 꽃을 피었고,
다른 나무들도 뒤지지 않으려는 듯 꽃을 피우려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꽃들을 당신의 은총으로 주시는데
이것을 감상하지 않는다면 그 은총을 선물로 고맙게 받는 게 아니라
쓰레기처럼 버려버리는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어제는 중국 갈 때 쳐두었던 커튼과 간유리 창을 열었습니다.
난방을 위해서, 곧 열이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중창을 다 꼭꼭 닫고 커튼까지 친 것인데
이것들이 꽃을 맘껏 보는 것을 막고 있으니
봄기운 완연한 이제는 열어젖혀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행전 베드로 사도의 <버린 돌> 얘기도
이런 관점에서 묵상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버리는 것은 두 가지 형태입니다.
싫어서 버리는, 곧 적극적인 버림이 그 하나이고,
그리 좋지 않아 선택하지 않는, 곧 소극적인 버림이 다른 하나입니다.
우리 가운데 꽃을 싫어서 버리는 사람이 있을까요?
꽃이라면 나는 무조건 싫다는 그런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냐는 말입니다.
혹 꽃가루 때문에 싫어할 사람은 있어도 다른 이유 때문이라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참으로 많지요.
긋그제 중국에서 돌아올 때 한성대 역에서 내려 수도원까지 걸어오는 길에
꽃집에 봄철 꽃들이 없는 것 없이 진열되어 있어서
삭막한 곳에서 있다 돌아오는 저는 황홀하게 꽃을 보며 오는데
상당수의 사람들은 걸으면서도 스마트 폰을 보느라 꽃을 보지 않는 겁니다.
부러 꽃 나들이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꽃 배달 선물과 같이
곁에 와있는 꽃을 보지 않는 것은 죄악이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어찌 꽃을 보지 않는 것인지.
우리에게 하느님도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무신론자라면 모를까 우리 중에 하느님이 싫어서,
더 나아가 하느님을 증오해서 버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싫어하지 않지만 그리 좋아하지도 않기에 가지지 않거나
좋아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사랑하지 않기에 가지지 않거나
사랑하기는 하지만 다른 것을 더 사랑하기에 그것을 선택하고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버리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꽤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가 인용한 시편은 <너희 집 짓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너희 집 짓는 자들>이 바로 우리라면
우리가 짓는 집은 어떤 집입니까?
우리 집입니까, 하느님의 집입니까?
하느님의 집을 짓는 사람이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모퉁이 돌 삼지 않는다면,
아니 다른 것들로 하느님의 집을 지으려고 한다면
과연 하느님의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 자문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