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줄곧 성령을 거역한다.”는 말 때문에 이러저러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무엇이 성령을 거역하는 것일까?
나도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일까?
의도적으로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이 있을까?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은 악령을 따르는 사람일까?
우선 복음에서 성령과 관련된 말씀을 가지고 묵상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첫 번째로 떠오른 것이 성령은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과 같다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고,
자신만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남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떠오른 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로 나가고,
거기서 악령의 유혹과 직면하시는 예수님에 관한 얘기였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신 주님께서 악령과 직면하시는 것을 볼 때
악과 마주하고, 악과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악에 자유롭지 못한 겁쟁이가 성령을 거역하는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의 고통과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리고 거기서 악령과 대결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 나가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떠오른 것은 예수님께서 게라사 지역에 들어가셨을 때
군대라는 더러운 영들에 사로잡힌 사람과 대면하신 얘기입니다.
그런데 군대라는 영들이 왜 더러운 영일까 생각해보니
게라사라는 지역을 더럽게 집착을 하기 때문이고,
사람 안에서 살 수 없으면 돼지 안에서라도 살며
게라사 지역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더러운 영들이나 더러운 영들에 사로잡힌 사람이나
자기가 살던 곳에 대한 애착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께 가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성령의 인도를 거역하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성령을 거역하는 또 다른 부류는 오늘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안에 갇혀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는 존재들이지요.
자기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성령의 새로움이나 신비를 볼 수 없습니다.
오늘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가 열려있는 하늘을 보고
그 열려있는 하늘을 통해 주님을 관상하는데 비해
스테파노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보라는 하늘은 보지 않고
분노에 가득 차서 그저 스테파노만 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세 가지 영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육의 영(spirit of the flesh),
주님의 영(Spirit of the Lord),
기도와 헌신의 영(sprit of prayer and devotion)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헌신의 영을 지니면 주님의 영을 영접할 텐데
육의 영을 지님으로써 주님의 영을 거역하고,
결과적으로는 더러운 영들이나 악령에 사로잡히게 되겠지요.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영을 우리가 지니게 되면
단련, 모욕, 수치 당하기를 원하며 천한 것으로 여겨지기를 원하고,
겸손과 인내, 그리고 순수하고 단순하며 참된, 영의 평화를 얻으려 힘쓰고,
무엇보다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한 두려움과
신성한 지혜와 신성한 사랑을 얻기를 원한다고 얘기합니다.
나는 어떤 영을 지니고 있을까?
나도 줄곧 성령을 거역하는 존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