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합니다.
자기의 어떤 목적이나 계획 때문에 가는 것도 아니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에 가는 것도 아니며
적대자들의 음모 때문에 가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요?
혹시 자기가 가기로 정하고는 성령께 이유를 돌리고,
상황 때문인데 성령께 이유를 돌리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바오로 사도의 말을 믿는다면
굳이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을 거라고 믿는다면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인도를 따르려는 마음가짐이 늘 되어 있었고,
성령의 역사하심이 자기에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일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령께 “사로잡혀”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이 다른 데서는 ‘매여’, ‘묶여’, ‘포로가 되어’등으로 번역되는데
바오로 사도에게는 이래저래 의미심장하고 밀접한 표현입니다.
우선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묶어(사로잡아)
예루살렘으로 끌어오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안티오키아로 가는 길에 도리어 예수님께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그 체험이 너무도 강력하고 강렬합니다.
불과 같은 열정으로 예수 추종자들의 씨를 말리려고 했기에 그랬을까요?
그 열정만큼 그것을 좌절시킨 주님의 강한 힘도 크게 느낀 것이고,
자기 의지와 반대되는 하느님의 뜻과
자기의 계획과 시도를 좌절시키는 하느님의 강한 힘을 느낀 것입니다.
이때부터 바오로 사도는 자기의 뜻과 계획을 접고,
오로지 성령께 사로잡혀 무엇을 하려고 하였을 겁니다.
그래서 이후의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께서 막으셔서
어디는 가지 않고 어디로 갔다는 식의 얘기가 많이 나오지요.
그리고 이제 성령께 묶이어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는데
가서 자기가 어떻게 될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투옥과 환난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예감하고 각오합니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다만 투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내가 가는 고을에서마다 일러 주셨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영적식별의 기준이고 표시입니다.
성령에 따라 가는지, 자기 뜻과 계획에 따라 가는지.
성령에 의해 하는지. 자기 생각과 힘에 따라 하는지.
그렇지요. 성령의 이끄심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한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지 투옥이나 환난을 택하여 하겠습니까?
입맛대로 먹으면 달콤한 것을 먹지 누가 입에 쓴 걸 먹겠습니까?
우리가 쓴 것을 먹는 것은 오직 사랑 때문일 경우뿐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기에 쓴 약을 먹고, 고통스런 수술을 받는 것이고,
자식을 사랑하기에 맛있는 것 자식주고, 자기는 나쁜 것 먹지요.
성령께서 이끄시는 곳은 편한 곳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사막으로 이끄셨고,
거기서 굶주림과 추위와 고독과 싸우게 하셨고
마지막엔 악령과 엄청난 유혹을 직면케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곳은 사랑할 곳이지 편한 곳이 아닙니다.
자기 전부를 바쳐 사랑할 곳이 성령께서 이끄시는 곳이고,
성령에 사로잡혀야만 그것을 감수하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나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성령에 사로잡혀 사랑 충만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런 고백을
저도 여러분도 언젠가 아무 주저함 없이 할 수 있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