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요한복음은 그 유명한 대사제의 기도이며 어제에 이어 오늘내일까지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전체가 그러하듯 여기서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이런저런 기도를 참으로 많이 하십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도 에페소를 떠나며
원로들에게 작별인사를 아주 길게 하는데
삼년 동안 그렇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서도 부족한 듯합니다.
“내가 삼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여 늘 깨어있으십시오.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이것은 성 프란치스코에게서도 마찬가지인데
제가 프란치스코의 글을 읽으면서 드는 첫 느낌은 수다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말이 많다고 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 많다고 이해해야 하고, 사랑이 많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사랑의 말을 사랑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수다스러움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또한 이해력의 부족이 아니라 사랑의 부족이라고 이해해야겠지요.
사랑하는 사람 간에는 참으로 할 말이 많고,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말이 많다고 생각지 않지요.
얼마나 할 말이 많은지 그리고 듣고도 또 듣고 싶은지
싫건 얘기하고 헤어져서는 또 전화로 길게 얘기를 나눕니다.
내일 일찍 출근하려면 일찍 자야 되는데 뭐 그리 할 말이 많으냐고
엄마가 타박을 해도 금방 잘 거라고 하고는 또 길게 얘기를 나누잖아요?
그런데 사랑이 없을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제 겨우 얘기를 시작했는데 ‘됐어, 됐어’하고
용건만 말하라거나 요점만 말하라며 말을 자르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의 말에서 사랑을 읽어낼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을 명심, 곧 마음에 새길 뿐 아니라 실천까지 해야겠지요.
그렇다면 요한복음 17장의 수다한 주님 말씀들 그 중에서도
어떤 말을 우리는 명심하고 실천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도록 부모의 유언에 비교하면 ‘부모가 제일 바라는 것은
너희 형제들이 싸우지 않고 화목하게 잘 지내는 거야‘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정도로 쉽게 그리고 가볍게 이해할 수도 있지만
좀 더 깊은 뜻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매우 신비적인 말씀으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제자들이 그저 인간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처럼>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인데
<우리처럼>이란 말할 것도 없이 <삼위일체>적인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같아서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이익이 맞아 떨어져서 하나가 될 수도 있으며,
목적하는 바가 같아서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심지어 공동의 적 앞에서 하나가 될 수도 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삼위일체적인 하나이심(Oneness)을 본받으라 하시고,
완전한 사랑의 신비적인 일치를 본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사랑으로 완전히 무화하심으로
완전히 하나가 되시고 사랑 하나만이 남게 되는 그런 것이며
너도 없고, 나도 없으며 너와 나의 사랑만이 남는 것이고
너와 나의 사랑이 곧 성령이신 그런 삼위일체적인 일치입니다.
아무튼 제가 말이 많은 것도 사랑이 많아서일까요?
사랑 안에서 <너와 나>가 녹아 없어지는 하나 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