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여러분,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어쨌거나 원망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원망이란 불행한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좋은 것이 아니고,
원망을 해봤자 나아지는 것 하나도 없기에 좋은 것이 아닙니다.
원망이란 자기 불행이 자기 탓이 아니라 남 탓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이 남 탓이라면 행복도 남 덕이고
나의 행복이 남의 손에 달렸다고 얘기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원망을 할 때마다.
아무튼 원망을 한다는 것은 불행타령이고,
그것도 남 탓을 하는 불행타령이며,
나의 행복이 남의 손에 있다는 노예의 불행타령입니다.
원망이란 이런 것이니 원망을 해봤자 나아지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원망을 하였으면 내일도 원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너로 인해 불행했으면 앞으로도 너로 인해 불행할 것이고,
지금까지 나의 행복이 너의 손에 있었다면 앞으로 그러할 것입니다.
이것이 원망의 철학이고 윤리학입니다.
그런데 오늘 야고보서는 이런 차원을 넘어섭니다.
원망의 신학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원망을 하면 심판자 주님께서 심판하실 거라고 얘기하니 말입니다.
우리의 원망은 서로 간의 원망으로 그치지 않고
주님의 개입을 초래하고 주님의 심판을 초래한다는 얘깁니다.
애들 싸움에 어른이 개입하는 형국인 것입니다.
권투 경기에 심판이 서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 원망을 할 때 주님께서 심판을 보신다는 얘깁니다.
주님께서 심판을 보시니 그 심판은 틀림없이 공정하겠지만
주님의 심판은 우리의 원망이 이유 없다고 하실 것이고,
원망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행복하라고 만드셨고
원망치 말라 하셨는데 원망이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담에게 하와를 주실 때 외롭지 않도록 주셨고,
동반자와 서로를 이끌어주는 존재로 주셨는데
죄의 탓을 하와에게 한 아담에게 벌을 주셨듯이
불행하다고나 하고
그 불행이 남 탓이라고 하는 우리도 벌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