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고
요한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즉, 성자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성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다른 위격이지만,
그렇게 성자는 성부와 달리
참 하느님이시면서 참 인간이지만,
아버지의 뜻을 이 땅 위에서 살아간다는 측면에서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십니다.
참 인간이기에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산란하시지만,
수난의 길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그 모습은
여느 종처럼 아무런 의지도 없이
맹목적으로 끌려가는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스스로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성령의 모습 또한
성부와 성자와는 또 다른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자께서는 성부께 돌아가셔서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 성령께서는 성자처럼
스스로 이야기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해 준 것을 넘겨 받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즉 성령 또한
성부의 뜻을 전하고
그것이 실현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렇듯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 다르지만,
성부, 성자, 성령의 활동은 모두 같은 것,
즉 성부의 뜻을 이 땅 위에서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뜻은
사랑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땅 위에서 사랑이 실현되기 위해서,
그 사랑이 완성되기 위해서,
아버지는 아들을 파견하시고,
그 아들은 또 다시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파견하십니다.
즉 사랑의 행위 속에서
하느님의 삼위일체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또한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삼위일체가 나타날 것이고,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를 위한 내어줌,
서로를 위한 받아들임 속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내 약점을 긍정해 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나를 온전히 너에게 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아가는 것은,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사랑 속에서
나를 감싸 안아주고,
이웃을 보듬어 주는 시간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