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오늘 주님께서 심판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이 말씀을 듣고
‘나는 왜 남을 심판하려고 들까?’ 대뜸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만하니까 남을 심판하지.’라는 뻔한 답이 있는데
그 답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기보다는 ‘심판하지 말고 그냥 조용하고 평안하게 살지
왜 괜히 남의 문제에 끼어들어 사서 문제를 만들고,
죄를 짓고, 관계가 틀어지는 등 불행을 자초하는 거야’ 뭐 이런 겁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살면 내가 만고 편한데도 굳이 심판함은
분명 남을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내적인 꼬여있음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심판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저의 내적 꼬여있음은 뭘까요?
무엇이 그렇게 배배꼬여있는 것일까요?
우선 가장 단순하게 생각해봤는데
제가 하늘을 보고 있었다면 심판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늘을 보고 있었다면 누가 뭘 했는지 보지 않았을 것이고,
보지 않았다면 심판이고 뭐고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다음으로 할 수 있을 겁니다.
왜 하늘을 안 보고 그를 봤을까?
뭘 볼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하늘을 보지 않고 굳이 사람을 보는 나,
많고도 많은 사람 중에 굳이 그 사람을 보는 나,
그 사람의 좋은 점 많은데도 굳이 안 좋은 것을 보는 나,
안 좋은 점을 보고도 심판하지 않을 수 있는데 굳이 심판하는 나,
이런 내가 문제의 원인입니다.
심판을 하기 위해 문제 있는 사람을 보려는 나,
‘이런 나’가 제 눈에 박혀있는 대들보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남의 죄를 본다고 하잖아요?
자기 안에 죄가 없으면,
자기 안에 죄 지은 나에 대한 미움이 없으면
미움의 화살을 밖으로 돌리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나를 미워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미움의 화살을 밖으로 돌리고,
미움의 화살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죄지은 사람이 어디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며,
죄지은 사람을 찾기에 그 사람의 좋은 점 많아도
죄만 콕 찍어서 보고 더 나아가 심판까지 합니다.
그러니 내 안에 대못이 박혀 있으면 대못을 빼고,
내 눈에 대들보가 박혀 있으면 대들보를 빼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