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다시 태어나도 이 수도생활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다른 생활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결혼생활,
저의 능력(음악, 문학 등)을 살려 전문직을 사는 삶,
산 속으로 들어가 홀로 고요하게 사는 삶 등.
그런데 이런 여러 가지 삶을 생각해봐도
수도생활을 안 하고 그 생활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다시 태어나도 수도생활을 하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라 초대하시면 자신 있게 나설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수도생활을 다시 하겠다는 말은 즉시 하면서도
주님의 초대에는 따르겠다고 즉시 응답치 못한다면
아! 저는 수도생활에 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을 계속 한다는 것에만 안심하고,
수도생활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다른 생활, 주님을 따르는 삶은 주저하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에 안주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것은 주저하다니!
수도생활이 주님을 따른 삶인데.
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슬픈 코미디인가?
그러니까 저는 이중으로 반성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수도생활이 주님을 따르는 생활이어야 하는데
우리의 수도생활이 이 세상에 안주하는 생활임을 반성하고,
아무리 지금 저희 수도생활이 이 세상에 안주할지라도
저라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 떠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지난 번 선교교육 때 프란치스칸은 본질적으로 선교사이어야 하고
아울러 예언자이어야 한다는 것을 공부하였습니다.
프란치스칸은 “가서, 나의 집을 고치라.”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니
본질적으로 주님의 파견을 받은 선교사이고,
우리 교회가 제도에 안주치 않고 순례하도록 쇄신을 해야 하니
본질적으로 예언자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선교사요 예언자가 되기 위해서 프란치스칸은 교회 안에 머물지만,
그래서 교회생활에 안주하지 말고 교회 밖으로 또한 나와야 한다고
지난 주 우리는 또한 공부하였습니다.
똑같은 얘기를 저는 저에게 해야 합니다.
주님을 충실히 따르는 순례자와 나그네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산다는 것에 안심하고 안주하지 말고
수도원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엄청 안주하는 삶을 삽니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는 안주치 않으려고 그리 발버둥치고,
같이 가는 공동체를 쇄신하기 위해 그리 애를 썼는데
저는 맡겨진 소임을 아주 열심히 하며 일에 안주하고
형제적 공동생활을 한다고 하며 공동체에 안주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큰 문제인지도 모르며 살아왔습니다.
오늘 열왕기를 보면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은 다음
부리던 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마저 부숴 그것으로 땔감삼아 음식을 바치는데
우리에게도 이런 결기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제게 필요한 것이 아닌지 성찰하는 오늘입니다.
그리고 저는 농담반진담반 이런 반성도 합니다.
나는 안주를 너무 좋아하는 것 아닌가?
술안주도 좋아하고 수도생활에의 안주도 좋아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