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잘 알다시피 매일 미사의 복음은 때를 나타내는 말로 시작되고,
오늘도 예외 없이 “그 무렵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로 복음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다시 “그때에”라는 말로 시작되는 문장이 이어지는데,
그런데 그때가 어떤 때이냐 하면
큰 풍랑 때문에 배가 파도에 뒤덮일 지경인 그런 때입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겁에 질려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데
그때에 주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우리 복음은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고 공경어를 쓰고 있는데
좀 불경스런 표현이지만 제 생각에 그때에 제자들은
‘이런 때, 이런 상황에서 잠이나 처자고 있냐?’고 했을 것 같습니다.
살다보면 오늘 제자들이 바다를 건널 때 배가 뒤집힐 위험에 처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의 바다에서도 풍랑이 일고 크나큰 환난에 처할 때가 있지요.
그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심한 경우 하느님께서 안 계시거나
적어도 내가 어려움 중에 있을 때 함께 계시지 않는 것 같고,
조시는 것도 같고 살려 달라 울부짖어도 못 들은 체 하시는 것도 같지요.
그러니 이런 때는 주님께서 우리의 꾸지람을 들어 마땅하거늘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꾸짖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고, 어찌 믿음이 그렇게 약하냐고.
이렇게 도리어 꾸짖으시는 주님이 너무 서운하고 원망스럽겠지만
우리는 꾸짖으심의 뜻을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꾸짖으시고 왜 꾸짖으시는지 말입니다.
제 생각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겁내는 것을 꾸짖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까짓 자연현상을 보고 겁을 내냐고 꾸짖거나
인간적으로 겁이 많고 소심하고 약한 것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지 않거나 온전히 믿지 못함에 대해서 꾸짖으시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와 주님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애가 닭을 보고 겁을 먹으면 그까짓 닭에게 겁을 먹느냐고
어찌 그렇게 소심하고 마음이 약하냐고 인간적으로 꾸짖는데
주님께서는 신앙적으로, 곧 믿음이 약하다고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한 배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이 말은 그러니까 우리는 죽지 않을 것임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우리가 죽으면 주님도 같이 죽으실 것임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나의 배 또는 우리의 배에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하고
한 배를 타고 있으니 주님과 나/우리는 운명 공동체임을 믿어야 하며
같이 있으니 죽지 않을 거고 죽으면 같이 죽을 거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믿음이 더 강한 믿음일까요?
같이 살 거라는 믿음이 더 강한 믿음일까요,
같이 죽을 거라는 믿음이 더 강한 믿음일까요?
제 생각에 같이 죽기에 죽는 것을 겁내지 않음이 더 강한 믿음입니다.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죽어갈 때 엄마가 옆에 있었으면
아이들이 덜 두려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이들의 동영상이 나중에 공개되었을 때,
그리고 거기서 아이들이 ‘엄마, 나 무서워!’ 하고 울부짖었을 때
그 엄마는 아이가 죽어가며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하며 괴롭고
아이가 죽을 때 같이 있어주지 못한 것이 너무 괴로웠을 겁니다.
그러니 같이 있으니 살리라는 믿음보다
같이 있으니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믿음이 더 강한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믿음을 청하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