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닌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하느님께서 당신을 위해 바라시는 것이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당신을 위해 바라시는 것은 없다는 것이 우리 믿음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당신을 위해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핍이 있다는 표시니 그런 하느님은 하느님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자비를 바라실까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고 자비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과 자비를 바라시다는 뜻일까요?
이 역시 당신을 위해서라면 ‘아니요’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바라신다면
우리의 사랑이 없으면 애정결핍으로 불행하기에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기에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사랑을 바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비는 더더욱 당신을 위해 바라지 않으실 것입니다.
라틴말로 Misericordia라고 하는 자비는 불쌍히 여김을 포함하는 말인데
우리가 당신을 불쌍히 여겨주기를 바라시겠습니까?
그런 하느님이라면 정말 하느님이 아니겠지요.
하느님이라면 우리의 자비가 필요 없고 오히려 우리에게 자비하신 분,
자비가 넘치셔서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어야 하지요.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필요 없으니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비를 바라시는 것은 다 우리를 위해서지요.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그것도 당신만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을 우리를 위해 바라시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는 것도
그래야 우리가 행복하기 때문이지요.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교황 프란치스코는 자비의 특별 희년인 올해 칙서를 내시면서
칙서의 이름을 <자비의 얼굴Misericordiae Vultus>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자비의 가장 완전한 얼굴이기에
매일같이 가장 완전한 자비의 얼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관상하면
우리도 그 모습을 닮게 될 거라고 칙서는 얘기합니다.
그렇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가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지요.
건강한 사람에게는 필요치 않고 병자에게 의사가 더 필요한 것처럼
자비란 의인이 아니라 죄인에게 더 필요하다고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을 관상하고, 주님의 자비를 관상해야 합니다.
당신을 위한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은 원치 않으시지만
우리가 진실한 기도를 바치는 것은 원하십니다.
그런데 기도중의 기도는 바로 자비관상의 기도입니다.
청원기도도 좋지만 다른 것을 청하지 않고 자비를 청하는 기도가 좋고,
자비를 청하는 기도도 좋지만 그저 자비를 관상하는 기도가 더 좋을 겁니다.
오늘의 기도는 하느님 자비를 수없이 뇌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수없이 바라보는 기도가 되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