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 4주일(가해)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라는 말씀과
그래서 하느님과 화해하는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이고,
구원의 때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순시기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려주는데
지난 주 우리는 갈증을 느끼는 사마리아의 여인이
영원한 생명의 물이신 주님을 만나 구원받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갈증을 느끼긴 하였지만 여인이 물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가가시어 물을 주셨습니다.
오늘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이 빛이신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소경도 스스로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가가시고 눈을 뜨게 하십니다.
복음을 보면 소경이 눈을 뜨게 되는 얘기가 모든 복음에 나오는데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마태오 복음은 비슷한 내용이 두 번 나오는데
두 소경이 지나가는 예수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청하여 보게 됩니다.
이에 비해 마르코와 루카 복음은 소경 하나가 청하여 보게 되는데
마르코복음에서는 그 사람의 이름이
바르티메오라고 구체적으로 얘기합니다.
이런 차이가 있지만
소경이 청하여 보게 된다는 면에서 공관복음은 같고
요한복음은 다릅니다.
요한복음의 소경은 왜 청하지 않았을까요?
공관복음의 소경들과는 달리 요한복음의 소경은 태생소경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분명히 이 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보다가 보지 못하게 된 소경은 빛의 세계를 알고
보지 못하는 지금이 매우 답답하여 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티메오는 지나쳐가는 예수님께 큰 소리로 자비를 간청하고
제자들이 나무라니 더 큰 소리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그만큼 간절했던 것이지요.
그에 비해 오늘의 소경은
보지 못함이 불편함도 어둠의 비참함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러했기에 그렇게 적응되어 불편함이 없고
빛의 세계를 알지 못하니 어둠은 어둠이 아니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등잔불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그것으로도 충분히 밝았습니다.
그러나 대낮같은 밤을 살고 있는 지금은
북한의 밤이 그렇게 불편하고 심지어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전화 없어도 불편하지 않던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가진 다음에는
일반전화밖에 없으면 서로 불편해 합니다.
본디 불편함이라는 것이 더 편리한 것을 아는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고
어둠은 밝음에 기대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불편함, 절망, 고통, 불행은
더 편리하고, 더 좋고, 더 즐거운 그런 세계를 알기 때문이고
그런 세계를 갈망하고 거기에 욕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울로 사도가 얘기하듯
우리가 율법을 알기 전에는 죄를 몰랐는데
율법을 통해서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온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소경으로 사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고
보게 되기를 원치도 않는 소경에게 예수님은 다가가서
보게 되기를 원하느냐고 묻지도 않으시고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런데 원하지도 않는데 소경을 보게 해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요?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곡을 보면
보게 되는 것이 꼭 좋은 것이 아닙니다.
소경이었던 소녀가 보게 됨으로 새롭게 열린 새 세상은
보기 전에 그리던 그런 아름다운 세계가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전의 좋았던 인간관계를 다 헝크르고
눈에 덮인 아름다운 세계가 눈이 녹으면 추해지는 것처럼
추할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에 눈 뜨려 하지 않고 안주합니다.
풀라톤이 동굴의 비유에서 얘기하듯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동굴 밖의 이데아 세계를 알려주는데
어떤 사람은 참다운 이데아의 세계를 찾아나서지만
어떤 사람은 동굴 속의 현실이 전부인 줄 알고 안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빛이신 그리스도가 열어 보이는 새로운 세계를
보려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보아온 세계의 질서 안에 안주하고 집착합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소경이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예수께서 법을 어겼는지 그렇게 신경을 씁니다.
자기들이 안주하는 기존의 질서를 깨는 것이 아닌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기존의 질서를 깬 죄인이라고 몰아세우자
“저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기대치 않았지만 보게 된 새로운 세계를
그는 주저 없이 구원으로 받아들였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분을 즉시 주님으로 고백하며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시듯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하면 그는 빛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는 빛을 본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비추는 빛을 본 것입니다.
그는 그저 어둠을 들추어내는 밝음을 본 정도가 아니라
어둠을 없애는 빛을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빛을 어둠의 반대로 생각하는데
어둠의 반대는 밝음이지 빛이 아닙니다.
빛이 있는 상태가 밝음이고 없는 상태가 어둠일 뿐이며
빛이 등장하는 순간 어둠은 존재조차 사라집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자기들한테 익숙해지고 길들여진 어둠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며
급기야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영적인 맹인이 됩니다.
소경을 죄인으로 단죄하였지만
사실은 빛이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이 죄인입니다.
세상 것에 눈이 멀어 하느님과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회개해야 할 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저도 이렇게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전에 그토록 애써 얻으려 했던 영적인 세계, 새로운 세계를
이제는 전에처럼 반기지 않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
복음의 소경은 이런 면에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큰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라는 말씀과
그래서 하느님과 화해하는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이고,
구원의 때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순시기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려주는데
지난 주 우리는 갈증을 느끼는 사마리아의 여인이
영원한 생명의 물이신 주님을 만나 구원받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갈증을 느끼긴 하였지만 여인이 물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가가시어 물을 주셨습니다.
오늘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이 빛이신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소경도 스스로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가가시고 눈을 뜨게 하십니다.
복음을 보면 소경이 눈을 뜨게 되는 얘기가 모든 복음에 나오는데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마태오 복음은 비슷한 내용이 두 번 나오는데
두 소경이 지나가는 예수께 눈을 뜨게 해달라고 청하여 보게 됩니다.
이에 비해 마르코와 루카 복음은 소경 하나가 청하여 보게 되는데
마르코복음에서는 그 사람의 이름이
바르티메오라고 구체적으로 얘기합니다.
이런 차이가 있지만
소경이 청하여 보게 된다는 면에서 공관복음은 같고
요한복음은 다릅니다.
요한복음의 소경은 왜 청하지 않았을까요?
공관복음의 소경들과는 달리 요한복음의 소경은 태생소경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분명히 이 점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보다가 보지 못하게 된 소경은 빛의 세계를 알고
보지 못하는 지금이 매우 답답하여 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티메오는 지나쳐가는 예수님께 큰 소리로 자비를 간청하고
제자들이 나무라니 더 큰 소리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그만큼 간절했던 것이지요.
그에 비해 오늘의 소경은
보지 못함이 불편함도 어둠의 비참함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러했기에 그렇게 적응되어 불편함이 없고
빛의 세계를 알지 못하니 어둠은 어둠이 아니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등잔불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고
그것으로도 충분히 밝았습니다.
그러나 대낮같은 밤을 살고 있는 지금은
북한의 밤이 그렇게 불편하고 심지어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전화 없어도 불편하지 않던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가진 다음에는
일반전화밖에 없으면 서로 불편해 합니다.
본디 불편함이라는 것이 더 편리한 것을 아는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고
어둠은 밝음에 기대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불편함, 절망, 고통, 불행은
더 편리하고, 더 좋고, 더 즐거운 그런 세계를 알기 때문이고
그런 세계를 갈망하고 거기에 욕망을 두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울로 사도가 얘기하듯
우리가 율법을 알기 전에는 죄를 몰랐는데
율법을 통해서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온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소경으로 사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고
보게 되기를 원치도 않는 소경에게 예수님은 다가가서
보게 되기를 원하느냐고 묻지도 않으시고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런데 원하지도 않는데 소경을 보게 해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요?
앙드레 지드의 전원 교향곡을 보면
보게 되는 것이 꼭 좋은 것이 아닙니다.
소경이었던 소녀가 보게 됨으로 새롭게 열린 새 세상은
보기 전에 그리던 그런 아름다운 세계가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전의 좋았던 인간관계를 다 헝크르고
눈에 덮인 아름다운 세계가 눈이 녹으면 추해지는 것처럼
추할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에 눈 뜨려 하지 않고 안주합니다.
풀라톤이 동굴의 비유에서 얘기하듯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동굴 밖의 이데아 세계를 알려주는데
어떤 사람은 참다운 이데아의 세계를 찾아나서지만
어떤 사람은 동굴 속의 현실이 전부인 줄 알고 안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빛이신 그리스도가 열어 보이는 새로운 세계를
보려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보아온 세계의 질서 안에 안주하고 집착합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소경이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예수께서 법을 어겼는지 그렇게 신경을 씁니다.
자기들이 안주하는 기존의 질서를 깨는 것이 아닌지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기존의 질서를 깬 죄인이라고 몰아세우자
“저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제가 눈이 멀었는데
이제는 보게 되었다는 것은 압니다.”
기대치 않았지만 보게 된 새로운 세계를
그는 주저 없이 구원으로 받아들였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분을 즉시 주님으로 고백하며 믿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시듯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하면 그는 빛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는 빛을 본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비추는 빛을 본 것입니다.
그는 그저 어둠을 들추어내는 밝음을 본 정도가 아니라
어둠을 없애는 빛을 본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빛을 어둠의 반대로 생각하는데
어둠의 반대는 밝음이지 빛이 아닙니다.
빛이 있는 상태가 밝음이고 없는 상태가 어둠일 뿐이며
빛이 등장하는 순간 어둠은 존재조차 사라집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자기들한테 익숙해지고 길들여진 어둠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거부하며
급기야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영적인 맹인이 됩니다.
소경을 죄인으로 단죄하였지만
사실은 빛이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이 죄인입니다.
세상 것에 눈이 멀어 하느님과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회개해야 할 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저도 이렇게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두렵습니다.
전에 그토록 애써 얻으려 했던 영적인 세계, 새로운 세계를
이제는 전에처럼 반기지 않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
복음의 소경은 이런 면에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큰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