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어제 저는 조심과 걱정의 관계를 봤습니다.
그런데 어제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심에 두려움을 조심과 비교하여 생각해봤습니다.
깊게 생각지 않고 언뜻 생각하여도
두려움은 조심보다 훨씬 더 중증의 경계심이고,
훨씬 더 부정적인 관계의 현상인 것만은 틀림없는 듯합니다.
예를 들어 감기를 조심하는 것은 목욕을 하면서 감기를 조심하는 거라면
감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감기 때문에 목욕을 못하는 정도이며,
그러기에 조심은 신경의 일부만 조심하는 것에 쓰는 반면
두려움은 온 신경을 두려워하는 것에 씁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심을 하는 경우 조심만 하지 조심에 사로잡히지는 않지만
두려워하는 경우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제 조심은 하되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조심은 하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왜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어떻게 하면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자기Ego>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 <자기>가 없으면 두려움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의 자기는 <참 자기>와는 다른 거짓 자기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 죽을 수밖에 없는 자기, 죽어야 할 자기이며,
두려움은 이런 자기가 죽을까봐 지극히 꺼리는 감정, 거부감입니다.
그리고 죽어야 할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은 이렇게도 나타납니다.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이 닥칠까 두려워하며,
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서
좋아하는 사람과는 헤어질까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사람과는 만날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싫고 좋은 것이 있는 한 두려움은 피할 수 없으며
싫고 좋음이 없어져야지만 두려움 또한 사라질 터인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싫고 좋음이 없어지느냐 이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 싫고 좋음을 없앨 수 있을까요?
억지소리 같지만 이 싫고 좋음을 초월해야만 되는데
이 초월은 사랑해야만 초월할 수 있고,
하느님을 만나야만 초월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초월을 하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초월을 하는 겁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가 바로 이런 초월을 합니다.
크고 두려우신 하느님을 만나자 오히려 두려움이 사라지고,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그 어디든지 두려움 없이 가겠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하느님을 두려워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라고 하시고,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위에서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도 그렇게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병환자를 통해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사랑하게 되었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사랑만이 좋고 싫음을 초월하고 두려움을 몰아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